씨앗. (사진=김연주 제공)
(위부터)비단팥, 앵두팥, 녹두팥 씨앗. (사진=김연주 제공)

작년 여름 전국여성농민회 제주도연합 회원들은 읍면 단위 지회별로 토종 씨앗 수집 조사활동을 벌였다. 무더웠고 무더웠던 8월 어느 날 오후 우리는 삼양동 해안마을을 찾았다. 시내이긴 해도 조그맣게 텃밭이 군데군데 보이자 우리는 토종 씨앗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콩을 심어 가꾸는 곳도 보이고, 호박넝쿨과 고구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곳을 보면서 텃밭을 가꾸는 삼촌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마시고 난 커피잔을 옆에 두고 담소를 나누시는 삼촌들 무리를 만나 오래도록 심고 가꿔온 씨앗들이 있는지 여쭙자 ‘이제는 다 사다 심는다. 그런 건 이제 없다’시면서도 ‘쪽파랑 세우리(‘부추’의 제주어;편집자)는 오래된 게 있다‘며 텃밭도 구경시켜주시고 당신의 삶을 조금씩 보여주셨다. 

마당 한켠에는 벌써 둥그런 노란 호박 서너 덩이가 있었고,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벌써 가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토종감”이라며 감나무 자랑이 주달린 감처럼 주렁주렁이시다.      

쪽파를 심고 계신 삼촌도 계시고 벌써 싹이 튼 쪽파밭, 아직 심고 있는 쪽파 등 주위의 풍경을 조금만 들여다보니 ‘지금이 쪽파 심는 시기로구나’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무더위를 이겨 내야 한겨울 우리의 입맛을 돋워줄 김장김치가 되고, 쪽파김치가 되는 것이로구나. 한겨울을 준비하는 한여름 농사라 생각하니 더위도 조금은 가시는 듯.
 

씨앗. (사진=김연주 제공)
왼쪽은 맷돌호박(위), 토종단호박(왼쪽 아래), 단호박(오른쪽 아래) 씨앗, 오른쪽은 반피동부. (사진=김연주 제공)

우영밭(‘작은 텃밭’의 제주어;편집자)이 있어서 상추, 가지, 배추, 물외(‘오이’의 방언;편집자), 고추, 부추 등 바로바로 찬거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키워 먹었는데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파 한단도 거의 동네 마트에서 사다 드신다고 하셨다. 

텃밭 농사를 하셔도 말끔하게 비닐멀칭(농작물을 재배할 때 경지토양 표면을 비닐로 덮는 일;편집자)을 해 놓고 고추 한 줄, 가지 서너 개, 오이 두어 개 이런 식으로 모종을 사다 심으셨다. 시기에 맞게 시장에 모종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여러 종류의 모종을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좋다 하신다. 

시원한 냉커피를 한잔 사들고 목도 축이고 다리도 조금 쉬면서 두런두런 토종 씨앗 이야기를 나눴다. 토종감과 쪽파종구 몇 알을 얻어 놓은 상태였다. 우리 팀은 토종 씨앗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고 토종 씨앗 농사도 지어 보지 못한 초보였고 토종 씨앗 수집 활동은 처음이었다. 두려움이 더 앞섰고 어찌해야 할지 잘 몰라 쭈뼛거리고 있었다. ‘교육받은 대로 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자신감만이 있었고, 선배 언니들이 먼저 한 활동들이 공유되고 있었으므로 겨우 용기를 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마무리하자며 간 곳은 젊은 삼춘집이었다. 젊으신 분이 어찌 씨앗이 이리 많으시냐 여쭈니 젊지 않다고 하신다. 잠기지도 않는 나무 대문이 있고 조그만 잔디마당이 있고 담벼락 둘레로 역시나 조그만 채마밭(채소밭;편집자)이 있었다. 옛날의 그 우영 느낌이었다. 세우리밭이 있고 군데군데 예쁜 꽃이 피었고, 고수를 좋아하신다는 삼촌이 막 고수 씨앗을 텃밭에 뿌리신 상태였다. 몇 개의 고추나무에는 벌써 빨간 고추를 매달고 있었다. 

토종씨앗 수집 조사를 마치면서 기념사진. (사진=김연주 제공)
토종씨앗 수집 조사를 마치면서 기념사진. (사진=김연주 제공)

대문 옆 조그만 공간에 씨앗 창고가 있었고 온갖 씨앗이 정갈하게 갈무리되어 내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호박을 잘라 호박도 나눔하고 씨앗도 분양받았다. 시금치 씨앗도 당신 혼자 드시기엔 많은 양이라며 나눔 받았고 고수 씨앗도 얻어왔다. 씨앗 받는 농사를 지으시는 삼촌을 만나니 절로 흥분상태였다. 궁금한 것도 많고 필요한 씨앗도 갑자기 많아진 듯하다. 

3월! 농민에게는 일 년 중 가장 가슴 설레는 달이 아닌가 싶다. 바람의 기운이 부드럽게 변하고 새소리는 더 활기차게 들린다. 짝짓기에 바쁜 장끼는 고운 색 옷으로 멋을 부리고 돌담 위에서 한껏 뽐을 낸다. 집을 지키는 멍멍이가 나른한 오후!

돌담을 살짝 넘기는 노란 유채꽃이 꿀 내음 가득히 넘실대면 농민은 이제 밭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더 분주해진다. 작년 세 번의 태풍으로 씨앗도 건지지 못한 콩을 올해도 해봐야 하나, 올해는 단호박 농사를 조금 지어 볼까? 밭이 조금 더 있었으면 요즘 금값이라는 대파도 조금 심어 볼 텐데….

해마다 적지 않게 씨앗 나눔을 한다. 작년에 나눔 받으신 분이 올해 다시 나눔을 원하시는 경우가 있다. 씨앗 받는 농사를 배워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여간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니 이해도 되지만 그 씨앗으로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도 흔하다. 이걸 심으면 상추가 나요? 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꽃이 피길 기다리고 열매가 맺길 기다렸다 씨앗을 받고 갈무리해 내년 씨앗으로 사용하려면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3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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