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날 아침이 되면 온가족이 분주했다. 부모님은 오토바이에 짐을 실어 먼저 출발하고 중학생 누나와 나는 서둘러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고향으로 가는 한림행 완행버스에는 사람과 짐으로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어린 나는 가끔은 어른들 무릎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친척들 집을 돌며 제를 지내고 새해인사를 하다 보면 금세 하루가 갔다.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면 마을 번화가인 동카름에서 노래대잔치가 열렸다. 커다란 멍쿠슬(먹구슬) 나무를 둘러싼 넓은 무대였다. 나뭇가지엔 커다란 백열등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고 무대배경으로 <금악리 노래자랑>이라 써진 은빛의 글귀가 걸려 있었다.

달랑 마이크 하나뿐인 무반주 노래대회였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뿜어내는 열기는 꽤나 뜨거웠다. 노래를 잘하던 아빠는 종종 심사위원을 맡았다. 때론 초대가수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다. 하얀 양복을 입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특유의 저음으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근사했다.

앵콜곡으로 자주 부르던 노래는 '체리핑크 맘보' 라는 곡이었다.

"능금꽃이 필 적에 귀여운 손목을 잡고

 첫사랑 속삭이던 그대는 어데 갔나"

이런 쉬운 가사와 귀에 익은 멜로디, 장난치듯 듯 툭툭 내뱉는 독특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노래였다. '맘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난 '곰보'라는 말처럼 어떤 모양을 지칭하는 걸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1930년대 쿠바를 중심으로 한 카리브해 지역에선 아프리카 리듬을 바탕으로 쿠바의 민속음악인 룸바(Rumba)와 당신의 주류음악인 모던 재즈가 혼재된 연주가 성행했다. 훗날 맘보의 왕이라 불리우는 쿠바의 작곡가 페레즈 프라도(Perez Prado)는 1943년부터 자신의 빅밴드에서 맘보(mambo)의 원형이 되는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 때아닌 맘보열풍이 불었다. 시대의 흐름을 맞춰 페레즈 프라도는 'Cerisier rose et pommier blanc'라는 샹송을 빅밴드 편성의 차차차 리듬으로 편곡해 1955년에 발표한다. 'Cherry Pink and Apple Blossom White'라는 제목의 이 곡은 무려 10주 동안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면서 맘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다.

미군부대와 AFKN을 통해 유입된 이 새로운 음악은 우리나라에서도 금세 인기를 얻어 아리랑맘보(1955년 전영주) 나포리맘보(1956년 현인) 늴리리 맘보(1957년 김정애)등의 많은 곡들이 발표됐다. 'Cherry Pink and Apple Blossom White'의 번안곡인 '체리핑크 맘보'는 1961년 처음 나왔다. 손영감이 새롭게 한글가사를 입히고 안다성이 부른 이 곡은 지금 들어도 무척이나 세련된 보컬과 훌륭한 빅밴드사운드를 들려준다.

익살스러운 트럼펫 소리가 귀를 잡아 끄는 멋진 인트로와 낭만이 가득한 가사, 경쾌한 선율이 함께 어우러지며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맘보음악은 당시의 암울했던 현실과 시대의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좋은 치유제였다.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네번째 월요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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