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규 할머니의 손녀 고가형 (사진=공동취재단)
 4·3희생자 유족 손민규 할머니 4·3희생자 유족 손민규 할머니의 손녀 고가형 (사진=공동취재단)

안녕하세요. 저는 손민규 할머니의 손녀 고가형입니다. 

저희 외할머니는 4·3유족으로 올해 여든여덟살이십니다. 할머니께서 열다섯살이던 시절, 할머니의 오빠는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방불명되신 후 지금까지 시신도 찾지 못하셨습니다.억울하게 돌아가신채 누명까지 쓴 오빠를 생각하며 슬퍼하시던 할머니를 볼때면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지난 3월 할머니의 큰 꿈이 이뤄졌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4·3행방불명수형인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번 재심에서 이 한마디만 전하셨답니다. '우리 오빠 명예회복만 해줍써~'

할머니는 4·3에 대해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지난 날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다행이라 하십니다. 이런 날이 올거라 생각도 못했다며, '이제 반가슴은 풀어졌다'고 하십니다.

재판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을 땐 저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늘 인자하면서도 강하게 보였던 할머니에게 이렇게 큰 아픔이 있는줄 몰랐죠

4·3당시 할머니는 지금의 저보다 어린 소녀였는데요, 그때 할머니의 꿈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동네에 소문이 자자할정도로 공부를 잘하셨다는데요, 할머니의 부모님도 우리 딸은 꼭 대학공부까지 시켜 선생님이 되게 해주신다 약속하셨답니다.

4·3희생자 유족 손민규 할머니가 4·3에 의해 희생된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할머니의 어릴적 꿈은 한순가에 무너져버렸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 도망가냐'셨던 아버지와 함께 불타버린 집, 함께 피난중에 총살당한 어머니,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 후 행방불명된 오빠. 할머니는 그렇게 홀로 남아 끼니 걱정에 공부는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친구들이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하십니다. 눈물이 쏟아지는 걸 많이도 참으셨다고 합니다. 
입밖으로 '엄마'하고 부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차마 불러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라고 얼마나 불러보고 싶으셨을까요. 저는 하루에도 수십번은 엄마를 부르는데, 저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가끔 할머니께 물어봅니다. 그때 4·3만 아니었다면 훌륭한 선생님이 됐을텐데 억울하지 않냐고. 그럴때 마다 할머니께서는 '경해도 살암시난 살아져라' 하십니다.

할머니! 이제 가슴 속 응어리 절반이 풀리셨다고 하셨죠? 앞으로는 제가 할머니의 상처를 낫게 해드릴게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심리치료사의 꿈을 이뤄 할머니처럼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계신 분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알고보면 할머니처럼 4·3으로 평생 힘들어하셨던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저 할머니를 생가하며 열심히 할게요! 그래서 꼭 할머니의 가슴속 응어리를 다 풀수 있게 해드릴게요.

할머니.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사랑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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