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선흘2리 우사를 개조해 만든 제주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 전경. (사진=황용은 전 대표)
2015년 4월 16일 선흘2리에 문을 연 제주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 전경. 기억공간은 개관 1171일만에 공존공간 선흘창고에서 반 강제로 짐을 뺐다. (사진=황용운 전 대표)

중앙로를 타고 제주시청을 지날 때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황용운 전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 대표를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봉두난발에 선글라스를 낀 그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0416기억할게' 부터 '대통령이 나서라'까지 등허리를 꼿꼿이 펴고 피켓을 들고 있던 그는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가까운 이들은 그를 '황장군' 혹은 '황추장'이라고 불렀다. 가만히 서 있어도 뿜어져 나오는 힘을 다들 느꼈던 모양이다. 

2014년 4월 16일. 탑승자 476명 가운데 172명 구조, 304명 사망・실종된 세월호. 그해 봄 서울 하늘은 한 달이 넘게 흐렸다고 한다.

세월호를 통해 국가의 민낯을 본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연행된 것이 벌써 7년.

정부는 진상규명을 위해 2015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2017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2018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를 설치했지만 여전히 빈손이다. 2019년 출범한 검찰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특수단)도 이렇다 할 성과 없이 1년 2개월만에 활동을 끝냈다.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아직 그 답을 듣지 못했는데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올해는 제주도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마이크 없이도 일당백 볼륨을 자랑하던 그, 무슨일이 있던 걸까.

(사진=박소희)
2021년 4월 9일 제주투데이와 인터뷰하고 있는 황용운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 전 대표   (사진=박소희 기자)

◇ 그간의 일 = 2014년 4월 16일 아름다운 가게 브랜드 ‘에코파트 메아리’ 팀장으로 근무하던 황 씨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세월호 전복 소식을 들었다. 사고 당시 침몰하는 순간까지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이준석 선장과 선박직 선원들이 해경123정 보트에 의해 구조됐다. 약 2시간 가량의 구조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구조돼야 할 나머지 학생들(승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해경은 끝내 탈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배는 그대로 가라앉았다. 너무나 비현실 적이어서 마치 황씨에게는 '죽음쇼'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오전 8시 50분경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됐고, 전원 구조라는 말에 단원고 학생 부모들은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사고가 난 진도 팽목항으로 향하는 전세버스에 올랐다. 이동하는 도중 갑자기 버스가 멈췄고 누군가 4반 전차웅 학생 부모를 밖으로 불렀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준비된 승용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자꾸만 주저앉는 마음을 희망의 지푸라기로 지탱하며 팽목항으로 향했고, 같은 시간 사고 현장 주변에 있던 어민들은 배가 좌현으로 기우는데 선박 안 승객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람 몇 명 구하도 못 하고 저 큰 배가 쏙 물에 잠수해버리네요. 음마, 음마. 이거 큰일 났구만 이거. 더 이상 안 가라앉겄소 완정히 들어가겄소요. 아, 니미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사람이 안 나와부네. 이거 뭐 다 죽게 생겼...사람 거 헬기로 몇 명 구하고 나머지 싹 들어갔어. 요거 어치케 살아나오겄어요. 아이고메. 죽겄구만, 에이고. 순식간에 아이, 요 구조도 못하고 들어가고만 잉. 배가 기울어 있으면 구명조끼 입혀서 딱 사람을 빠쳐머려야지, 물로다가. 선장이 뭐하는 것이여. 옴마옴마 다 죽고 한 사람도 못 구하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니애미 XXX 사람도 못 구하니. 진짜 오메. 사람 몇 명 구하고 말았겄소. 이거 환장해 죽겄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로 에이 니미 XX. 한 사람도 구조... 옴마옴마 한 오백 명 죽어, 오백 명. 몇명 구하고 다 죽네.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10:07 - 10:26 사이 세월호 침몰현장 주변 어민 교신 음성 일부>

2014년 4월 18일 이틀 만에 선체는 바다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세월호 핵심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을 시도하는 동안 말 잘 듣던 학생들은 살아남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선실에 갇혀 익사했다. 세월호 침몰로 대한민국의 모든 단층이 드러났다. 책임의식과 사명감 없는 사령탑, 무능력한 해경. 탑승자와 피해자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중앙재난대책안전본부(중대본). 국가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낸 세월호.  

2014년 말 기소권, 수사권 없는 반쪽짜리 특별법이 제정되며 세월호 투쟁이 길어질 게 분명해졌다. 권력의 턱끝에서 책임을 압박할 힘을 규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2015년 1주기 이후 지속해서 투쟁을 끌어갈 '4·16연대'가 만들어졌다. 가족협의회가 유가족 중심 의결기구라면 4·16연대는 흩어져 있던 시민조직들의 연대체였다. 

전국적인 볼륨감이 필요했던 4·16연대는 제주도에 처음 세월호 공간을 만든 황 씨에게 운영위원을 제안했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했다. 독자노선을 택한 야인이 2015년 운영위원을 맡았던 건 정치권 압박을 위해서는 시민연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4년 5월 1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세월호 추모집회에 참석한 황용운 제주 기억공간 re:born 전 대표. (사진= 최형락 프레시안 기자)
2014년 5월 1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세월호 추모집회에 참석한 황용운 제주 기억공간 re:born 전 대표. (사진= 최형락 프레시안 기자)

2017년 정권이 바뀌었다. 국정농단에 의한 비참한 몰락이었지만, 박근혜 탄핵 여론에 불을 붙인 건 세월호였다. 황용운 씨는 세월호 정권 탄생에 희망을 가졌다. 

이듬해, 박근혜 정부 시절 만들어진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문건이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 뒤 인양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희생자를 수장하자'고 청와대에 건의하는 내용이었다. 해당 문건은 기무사 요원 60여명으로 구성된 세월호 티에프(TF)가 2014년 5~6월 유가족들을 사찰한 뒤 작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수사하던 특수단은 유족 사찰 의혹에 대해 "실체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세월호에 대한 박근혜 정부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건이었다. 황 씨 딴에는 유족들이 뒤집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당장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야 할 상황인데 이상했다. 

그는 답답했다. 세월호 사고 직후 구조 골든타임을 놓친 정부 책임론이 불거졌지만 현재까지 형사처벌을 받은 정부측 관계자는 ‘해경 123정’ 김경일 정장(경위) 단 한 명 뿐. 그것도 현장에 도착한 경찰 간부 중 가장 말단이다. 선박 사고의 원인과 선원의 잘잘못을 최종 판단하는 해양수산부 소속 해양안전심판원은 현재까지 최종조사보고서도 내놓지 않고 있다. 

진상규명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급격한 변침을 사고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정작 급변침을 한 요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인양 후 선체를 조사한 선조위 안에서 외인설과 내인설 주장이 엇갈렸다. 세월호를 둘러싼 각종 의혹도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는 "믿었던 현 정권이 들어서고 세월호 투쟁은 이전보다 난해한 국면으로 흘렀다"면서 "세월호는 크게 길게 보자는 운동 노선과 당장 책임자 처벌부터 해야한다는 투쟁 노선으로 갈렸다."고 했다. 노선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제주시청 앞에서 (사진=황용운 전 기억공간 re:born 대표)
2018년 7월 21일 제주시청 앞에서 세월호 참사 전면 재수사를 촉구하고 있는 제주 기억공간 re:born 전 대표. (사진=황용운 전 대표)

◇ 문재인 정권의 기만과 세월호 운동의 분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세월호 투쟁 일선에서는 운동에 대한 고민이 복잡해졌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처럼 대놓고 진상규명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인 재수사에 나서지도 않았다. 

긴가민가 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다. 황 씨는 인터뷰 내내 "이상했다"는 말을 많이 했다. "설명할 순 없는데 찜찜한 건 알겠는" 그런 상황들이 자주 펼쳐졌다. 분명 정권교체가 이뤄졌는데, 세월호는 제자리였다. 문재인 정권에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고, 의혹을 증폭시킨 건 2019년이었다. A4 용지 박스 2개 분량의 세월호 관련 문건을 청와대가 파기(2017년 7월)했던 정황이 뒤늦게 드러난 해였다. 당시 파기 지시를 받은 청와대 직원은 '개인적으로 괴로웠지만,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도대체 왜? 그해 황 씨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와 직권남용 등의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7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황 씨에게 문건 파기와 공소시효는 '현 정권 의지 없음'으로 읽혔다. 그때부터 416연대 운영위에 참석할 때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공소시효 만료 전 대통령 직속 특별수사단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현 정권과 친화적인 집행부는 가족협의회를 내세우며 황씨 의견을 묵살했다. "가족들이 더 원하지 않겠어? 당신 말이 맞는데,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잖아." 그는 유족 논리가 나오면 강경하게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세월호 전복은 사고였을지 모르지만, 사고로 인한 304명 희생은 인재였다. 국가의 책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에게 유가족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연대의 대상이었다. 사회적 연대를 통해 국가에 책임을 함께 묻고 그 의무를 다하게 해야 했다. 세월호는 유가족 당사자 문제기도 했지만 안전한 사회로 국가를 재편하는 모두의 문제기도 했다. 

지난 7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를 몇 번. 정부가 위원회를 꾸려 조사를 하고 있으니 기다려야 한다는 논리가 황 씨는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에게 조사위는 현 정부의 명분을 유지하는 기만 그 자체였다.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는 조사위를 만들어 놓고 활동과 종료, 종료와 활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침몰 원인 확증 불가'가 지금까지 결론이다. 공소시효를 알게 된 이후부터 조바심이 났다. 

지난해 10월 사참위 종료(2020년 12월 10일)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직속수사대 설치와 사참위 연장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연대하기로 했다. 사참위를 연장하면 문 정권 말기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방패로 사참위를 써먹을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4·16가족협의회 등은 지난해 10월 26일 청와대에서 단식을 하고 있는 김성묵 생존자 앞에서 '4·16 진실버스' 도착 기자회견을 했다. 단식투쟁단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그들 뒤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가족협의회 등은 사참위 연장을 외쳤고, 단식투쟁단은 사참위 연장은 진실규명을 하지 않으려는 문재인 정부의 꼼수라고 지적했다.
4·16가족협의회 등은 지난해 10월 26일 청와대에서 단식을 하고 있는 김성묵 생존자 앞에서 '4·16 진실버스' 도착 기자회견을 했다. 단식투쟁단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그들 뒤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가족협의회 등은 사참위 연장을 외쳤고, 단식투쟁단은 사참위 연장은 진실규명을 하지 않으려는 문재인 정부의 꼼수라고 지적했다. (사진=황용운 제주 기억공간 re:born 전 대표)

◇ 그래서 청와대로 갔다= 지난해 10월 김성묵 세월호 생존자가 대통령 직접 행동을 촉구하는 무기한 단식을 청와대 앞에서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김성묵 청와대 단식투쟁단'이 꾸려졌다. 

황 씨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올해 4월 15일 7년 공소시효 만료. 1년 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자 처벌을 원하던 황 씨의 선택 기준은 단순했다. 공소시효가 지나기 전, 다 태우자는 심정으로 청와대로 향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고, 제주로 돌아갈 땐 모든 것을 훌훌 털자.' 그런 각오였다. 

세월호 투쟁 전선에서 유가족 중심의 연대체와 척을 지는 건 유가족을 배신하는 것과 등가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힐난했고, 누군가는 질책했고, 누군가는 이간질했고, 누군가는 염려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황 씨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국가에 책임을 묻고 싶었다. 그것이 고립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황 씨는 제주시 조천읍 와산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 물건을 지난 2월 9일 모두 정리하는 것으로 세월호 기억투쟁을 더는 하지 않기로 했다. (사진=황용운 씨)
사참위 연장이 이뤄진 지난해 12월 세월호 투쟁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 황 씨는 제주시 조천읍 와산 창고에 보관하던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 물건을 지난 2월 9일 모두 정리했다. (사진=황용운 전 대표)

◇ 답은 구하지 못했는데 질문만 추가됐다= 결국 사참위는 지난해 12월 9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조사는 거세하고 세월호 진상조사 인원만 충원하는 방향으로 연장됐다. 위원회 활동 동안 세월호참사 관련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하는 항목도 신설됐다. 황 씨의 요구가 담긴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아니라고 한다. 모든 의혹을 밝히겠다는 윤석열 발 특수단은 박근혜 정부 윗선에 면죄부를 주며 지난 1월 19일 활동을 종료했고, 기소권도 수사권도 없는 사참위는 내년 지방선거까지 정부 여당의 명분으로만 존재하리라는 것이다. 

황 씨는 "사참위는 내년 6월 지방선거 직후까지로 연장됐다. 이는 문재인 정권이 세월호가 아직 선거용으로 활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안방의 세월호라 불리는 가습기 참사도 아직 미해결인데, 이번 연장 논의 당시 날아갔다. 세월호도 다음 지방선거까지는 유명무실 유지하다가 여론이 죽으면..."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014년 4월 그는 처음 투쟁에 나섰던 서울 광화문 광장을 떠올렸다. 석 줄로 선 경찰이 “이게 나라냐”를 외치는 시민들을 ‘ㄷ’자로 두르고 있었다. 그는 삼중벽 안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연행을 시작하니 학생과 기자는 삼중벽 안에서 나가라”는 경찰의 해산 명령이 떨어졌고 삼중벽은 곧 ‘ㅁ'자로 닫혔다.

삼중벽 안에서 연행을 거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동안 2층 커피숍에서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 지나가다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삼중벽 안 공기와 끝내 짓눌리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각자의 포즈로 지켜보는 삼중벽 밖 시민들. 침몰하는 배 하나 구하지 못했던 국가. 그런 국가를 향해 분개하는 시민들. 그런 시민들을 연행하는 경찰. 설명할 수 없지만 그는 이 장면을 보며 세월호 투쟁을 결심했었다. 

황 씨는 2015년 제주에 내려와 지금까지 8곳을 전전했다. 자신이 안락해지지 않는 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라고 믿었다. 상처가 회복되면 세월호 투쟁을 다시 시작할 것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세월호 투쟁을 시작하며 나는 닫힌 삼중벽을 뚫고 나온 지 알았다. 벽 밖으로 나왔으니 구경하던 시민들이 듣고 싶은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면 더 많은 연대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제주에 내려와 편한 보금자리 하나 없었지만 힘들지 않았던 이유다. 그런데 단식투쟁단과 결합하면서 알았다. 삼중벽은 견고했고, 그 안에는 보이지 않던 벽이 또 있었다"고 했다. 

결정적 펀치는 적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왔다. 적이라면 멱살이라도 잡을텐데, 그는 미워할 수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내적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그에게 세월호 유가족은 여전히 연대해야 할 시민이다. 단지 그는 미온적인 그들의 운동 방식에 동조하지 못했을 뿐이다. 

"투쟁을 막 시작할 때 주변에서 지칠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 막상 우려를 현실에서 맞아보니 생각보다 펀치가 쎄다. '지금까지 뭐한거지?'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바닥을 더 치면 그때부터는 남는거라고 하던데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은 판단이 잘 서질 않는다. 분명했던 것들이 분명하지가 않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가 않다. 남들보다 회복탄력성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자존감이 아찔할 정도"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애초 '기억하자 0416'이 아니라 '드러내자 0416'을 외쳤어야 했다고 하며 "많이 허망하다"고 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겠기에, 2021년 4월 그는 새로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인가.'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