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김지민)
(그림=김지민)

어김없이 4월이 돌아왔다. 4·3을 알기 전까지 나에게 있어 4월은 3월 다음에 오는 달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1년 중 가장 바쁜 달이 되었다. 4월의 제주도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관광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는 날이 많다. 내가 처음 4월의 제주도를 목도했을 때, 육지(제주에서는 주로 한반도 지역을 육지라 일컫는다)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놀랐다. 제주도에서는 4월 내내 제주 4·3과 관련된 행사들이 열린다. 4월 3일 당일에 4·3 평화공원에서는 추념식이 열린다. 마을마다 자체적인 위령제나 굿이 진행하기도 한다. 곳곳에서 4·3을 주제로 한 예술 전시나 공연이 열린다. 텔레비전을 켜면 뉴스부터 토론회, 그리고 다큐멘터리까지 4·3을 주제로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계속 방영된다.

제주에서 몇 번의 위령제를 보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 있다. 제주 4·3 70주년에 열린 해원상생굿 때였다. 그 해의 굿은 하루 안에 끝나던 기존의 해원상생굿과는 달리 며칠 동안 이어졌다. 4·3 평화공원의 위령 광장에 크게 차려진 굿판 앞으로 유족들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줄지어 놓여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았었지만, 내리쬐는 태양에 덥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큰 굿은 처음 보는지라 굿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제사상을 구경했다. 그때 어느 할망(할머니의 제주어)께서 지팡이를 짚은 채 느릿한 걸음으로 굿판에 오셨다. 그 할망께서는 배추 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셨는데, 천천히 내려놓으신 그 상자에는 제사상에 올릴 빵들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지 못 했지만 아마도 보리빵이나 찐빵이었던 것 같다. 그런 할망의 모습을 주변에 몰려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에 담았다. 할망께서는 멋쩍은 듯 허허 웃기만 하시며 빵을 상에 올리시고는 다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셨다. 그날 저녁 무렵, 굿이 파하고 호텔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엉엉 울었다. 제주 4·3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상자를 메고 와 천천히 내려놓으시던 할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울었을까. 그 날은 침대에 엎어져 울면서도 내가 왜 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진에 담았던 할망의 모습을 따라 그려보면서 조금씩 깨달았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소중했을 누군가를 기리며 지내왔을 할망의 마음이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세월 동안 한국사회는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제주 4·3을 숨겨왔으며 외면해 왔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함과 동시에 화가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 날 느낀 것은 나 혼자만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일진대 태어난 시기와 장소가 다르다 하여 외면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지난 9일, 사회적 트라우마 사건의 생존자와 유족들에 대한 국가권력의 책임과 대중의 역할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제주 4·3 73주년을 맞아 영국에서 열린 ‘4월 세미나 시리즈’의 마지막 토론으로, 제주 4·3과 함께 세월호 참사와 영국 힐즈버로우 스타디움 참사(1989년 4월 15일 힐즈버로우 스타디움에서 9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경기장의 안전문제와 경찰의 관중 관리 실패 때문이었지만, 사건 직후 권력 당국과 언론은 축구 팬들의 주취 폭력 등이 원인이라며 피해자를 탓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를 다루었다. 세미나 토론 패널은 킹스 칼리지 런던 박사과정에서 제주 4·3 생존자 트라우마를 연구 중인 필자 본인과 사회학자이자 힐즈버로우 스타디움 참사의 생존자인 앤 아이어 박사 그리고 세월호 영국 모임의 데비 킴이었으며, 같은 모임의 앤드류 잭슨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이 세 사건들이 함께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특히 제주 4·3은 국가권력이 자국민에게 이념적 의도를 갖고 자행한 국가폭력이라는 성격도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룬 두 참사들과는 결이 다르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4월에 발생한 이 사건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국가가 국민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가 책임과 의무를 다 하게 할 것인가? 이에 패널 토론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었던 지점은 ‘연대’였다. 연대 범위는 생존자나 유족들과 같이 소위 ‘당사자’들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상실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공감해 줄 대중들까지 포함한다. 개개인들이 할 수 있는 연대란 거창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하는 것.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사안을 주시하는 것.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소리쳐 주는 것. 계속해서 기억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많은 개인들이 그런 연대 의식을 가지고 실천할 때, 우리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의 힘은 국가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게 하며 정의를 구현하게끔 하는 것에 발휘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 4·3 또한 세계적으로 공론화하고 세계 시민들과 연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제주 4·3은 다른 두 사건보다 오래전에 발생하였고, 사건에 대해 침묵할 것을 강요당한 시간은 그만큼 길었다. 때문에 생존자들과 유족들, 그리고 제주 시민사회가 4·3 진상규명조사를 착수시키고, 4·3 특별법을 제정하고, 또 그것을 개정하기까지도 참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비록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지만, 국방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제주도에 와 4·3 추념식에 참석하기까지는 73년이 걸렸다. 국내에서 걸린 시간과 노력도 그럴진대, 제주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까지 묻기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국제적 연대의 구축은 단연 제주 4·3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미나에서 제주 4·3뿐 아니라, 다른 시대, 다른 국가와 지역의 사회적 트라우마 사건들을 함께 다룰 수 있게끔 기획한 이유도 여기 있다. 각각의 사건들이 따로 흩어져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비극’ 또는 ‘참사’ 등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어 서로의 경험들을 나누고 그 속에서 공통점을 찾으며 함께 해결점을 찾을 때, 이것은 시공간을 넘어선 진실과 정의,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의 족적이 된다. 세 사건 모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마음속 응어리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내가 해원상생굿에서 보았던 그 할망은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건들의 생존자와 유족들이 할망의 시간만큼 같은 무게를 마음속에 더해 가는 것을 두고 봐서는 안 된다. 글로벌 사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되어 서로를 기억하고 연대해야 한다.

 

 

 

 

 

김지민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제주 4·3에 대해 연구 중인 김지민은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와 런던을 잇는 [지민in런던]은 매월 둘째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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