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악몽 같던 군 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읽었다. 학생운동을 했던 주인공의 심적 방황과 고민들이 주 내용이었는데 정작 나를 흔들어 놓은 것은 짧게 언급된 장기수들의 삶이었다.

해방 이후 역사적, 정치적 혼돈기에 선택한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수십 년의 수감을 마다하지 않은 장기수들의 생을 보며 부끄럽게도 덜컥 두려워졌다. 만약 국가가 절대적 권력을 무기로 신념과 사상의 자유를 버리고 체제에 무릎 꿇을 것을 강요했을 때 과연 나는 버틸 수 있을까. 개인과 가족의 안온한 삶을 무너뜨리고 말 것을 경고할 때도 과연 나도 이겨낼 수 있을까. 그 해 여름 난 복학을 포기하고 일상의 삶을 선택했다.

지난 4월초 우연히 몇 분의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났다. 사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감수한 수십 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온 선생님들은 앳된 청년에서 지금은 팔구십이 넘는 노구가 되었다. 혼자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육신은 쇠락했지만 해방 직후 당신들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 할 때만큼은 또렷하고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스로 길을 선택한 결과로 얼핏 보면 쓸쓸한 노년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념을 지켜낸 삶은 치열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십 수 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겨우 다시 신념의 생으로 돌아온 내게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걸어온 길은 진정한 선생(先生)의 길임을 깨달았다.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에서는 세계인권선언 제19조(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를 설명하면서 ‘누구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으며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보장될 때 완성’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19조에도 모든 국민의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표현 및 언론의 자유, 성적 자기결정권 등 많은 양심의 영역에서 자유를 부정당하거나 제약당하고 있다.

특히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이유로 구시대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존치되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삶을 강제로 가둔 것도 국가보안법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은 곧 그 국가가 얼마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지를 말해준다.

인간으로써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국가나 법률이 제약할 수 없다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진리이다. 더 이상 한국사회가 진리를 부정하고 상식을 거부하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고 기본적 인권이 당연히 보장되는 사회로 변화하기를 기대해본다.

짧은 만남을 마치고 떠나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보며, 어쩌면 저들의 삶 자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항해하는 배를 움직이는 돛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긴 세월 굴종하지 않고 굽히지도 않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께 감히 존경과 고마움을 전한다.

부장원 민주노총제주본부 부장원 조직국장
부장원 민주노총 제주본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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