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 살인사건》
카멜 다우드 소설, 조현실 옮김, 문예출판사

내가 아직 어린이였을 때 소설은 참으로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그 속에는 결코 경험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온갖 모험과 사랑이, 삶과 죽음이 있었다. 아, 작가라는 족속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쓴 거지? 그게 허구인 줄도 몰랐다.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한번쯤 살고 싶은 그 어떤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인생교본 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이야기를 살고 싶었다!

나중에 알았다.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허구, 虛構), 결코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었다. 삶이 작아졌고, 슬퍼졌다. 그게 내가 처음 떠안게 된 삶의 비극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소설이 어려워졌다. 중학교 무렵이었던가. 이야기를 살고 싶다는 충동에서 이야기를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 시작은 카뮈의 《이방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살인은 악당의 전유물이었는데, 응징해야 마땅할 범죄였는데, 사람을 죽이는 주인공이라니.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인을 살해했고, 《이방인》의 뫼르소도 사람을 죽였다. 그렇게 ‘문학적 살인’이 나를 찾아왔다. 작가들은 살인이라는 극단의 행위를 통해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가치관을 충격하고, 고여 있는 삶을 타격했다. 안티 히어로들의 형이상학적 활극이었다. 물론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그중 하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왜 살인을 했을까? 칼날에 반짝이는 햇빛 때문에? 정말? 그 대답은 당신이 《이방인》에서 찾아야 할 몫이다. 대답 대신에 나는 몇 해전부터 읽으려고 벼르다가 이제야 다 읽은 다른 소설 하나를 더 권할 참이다.

바로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이다. 불어 원제목은 《Meursault, Contre-Enquête》이다. Contre-Enquête는 ‘반대 조사’라는 뜻인데, ‘반대 심문’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의 표현인 것 같다. 뫼르소의 주장에 반박하는 조사라는 정도로 읽힌다.

이 소설은 카뮈의 주인공인 뫼르소의 진술에 반박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종의 《이방인》 다시 쓰기인 셈이다. 소설의 요체는 이렇다. 뫼르소가 죽인 인물은 아랍인인데, 그 아랍인은 소설 속에서 스물다섯 번 등장하지만 이름이 없다. “아랍인이야말로 두 번째로 중요한 등장인물인데도 이름도, 얼굴도, 말도 없어.” 카멜 다우드가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왜 죽은 아랍인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 살인자의 말에만 다들 관심을 갖는 것인가? 그래서 작가는 죽은 아랍인의 동생과 가족을 등장시켜 뫼르소의 이야기를 전복시킨다.

여기에는 하나의 트릭이 존재한다. 실제 《이방인》을 쓴 것은 카뮈이지만, 소설에서는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가 <타인>이라는 소설을 쓴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 속 작품인 <타인>이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면 《뫼르소, 살인사건》은 ‘살아남은 자의 비망록’이 된다.

《이방인》과 <타인>은 “오늘, 엄마는 죽었다”로 시작하지만, 《뫼르소, 살인사건》은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로 시작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 이 얘기는 다시 쓰여야 한다는 거지. 같은 언어로 쓰되, 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 왼쪽에는 알제리 식민시절의 비참한 현실과 독립 후의 혼란한 상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 왼쪽은 어쩌면 카뮈가 미처 담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부분일 것이며 카멜 다우드가 의식적으로 서있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뫼르소, 살인사건》의 작가가 카뮈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뫼르소의 실존적 형이상학을 거의 동일하게 반복하게끔 만들고 있다. 그 같은 반복이 가능한 것이야말로 카뮈의 《이방인》이 갖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은 맨 오른쪽의 소설들 중 하나인 셈이다.

앞서 말했지만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을 다시 쓴 소설이다.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쓰여지고, 독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겹쳐진 두 이야기를 함께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겹쳐진 텍스트는 읽는 사람의 또 다른 상상까지도 겹쳐놓도록 만든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문학’이 된다.

자, 그러면 이 글의 독자들인 당신들께 질문! 나의 이글이 당신들에게는 ‘텍스트’인가 아닌가? 만약 ‘텍스트’라면 '좋아요'를 꾹! 여유가 된다면 댓글도! ‘좋아요’와 댓글 없는 문학이야말로 세 번째 ‘문학적 살인’이지 않습니까?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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