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이 아니라 너무도 평화가 간절한 섬 제주. 이 땅의 역사가 일러주는 손짓이고, 지금 여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석양의 유채꽃. (사진=조성진 작가)
석양의 유채꽃. (사진=조성진 작가)

#유배문화에 대한 유배적 인식

오래전 거제도에서 지역신문 편집일을 맡아 몇 년 살면서 우연히 거제군지를 새로 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역부족으로 끝내 책을 내지는 못하였지만 덕분에 팔자에 없는 거제도 역사 공부를 좀 하였다. 그중 유배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하기도 했다.

흔히 유배라 하면 조정에 벼슬아치들이 죄를 짓거나 정쟁에 휘말려 변방의 오지나 섬으로 귀양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연유로 섬지방에서 양반이나 선비 문화의 계승이라는 자부심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실제 그러할까?

조선왕조실록의 거제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수원의 소도둑 30명을 거제로 귀양 보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에 비추어보면 지체 높은 양반이나 관료뿐 아니라 말 그대로 온갖 잡범들을 붙들어 귀양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중앙정부는 변방이나 섬지방을 갖은 쓰레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여긴 것 아닐까.

그리고 거제도의 경우 중국과 일본을 잇는 남해안 해상교역로의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강화될수록 쇠락을 면치 못하였다. 왜와의 관계 특히 대마도와는 거의 이웃처럼 지냈다. 대마도에서 고기잡이 나왔다가 돌아가기 힘들면 거제도에서 묵고 그러다가 살림도 차리고, 반대로 거제도의 경우도 대마도로 왕래하는 일들이 빈번하였을 것이다.

물론 두 나라 정부 간 관계가 악화되거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 왜군이 되고 왜구가 되었겠지만 그런 반목은 일시적이거나 중앙집권이 강화된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한 번씩 독도와 패키지로 묶어 대마도도 우리땅이라는데 그거 대마도 주민들에게 물어봤는가? 주민들이 얼쑤 좋다 하겠는가? 이 또한 국뽕에 다름 아니다.)

환해장성.배를 타고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환해장성. (사진=제주투데이DB)

#전쟁의 참화를 맨 앞에서 당한 제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처럼 중앙집권이 강화될수록 섬지방은 더 많이 변경이 되고 외곽의 찬밥신세가 되기 마련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지역의 자치나 자율적 요소가 커질수록 주민의 삶은 편해지는 거고.

제주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적인 예로 아직 일부 해안을 따라 흔적이 남아있는 환해장성의 경우 고려 때 처음에는 저항군인 삼별초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 삼별초가 장악한 뒤에는 되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을 막기 위하여 쌓고 이도저도 지난 뒤에는 다시 왜구를 막기 위하여 이어 쌓았다고 한다.

적을 막기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의 돌담에 가까운 알량한 축성이지만 그래서 그 효율성이 의심스럽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거 누가 다 쌓았는가. 그것도 환해라 하지 않는가. 바다를 빙 둘러 돌을 쌓는 노역에 동원된 제주민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거 아닌가. 

원나라가 지배하던 시절 제주도는 처음 원의 직접 통치를 받다가 이후 100년 가까이 자치구에 가까운 성격을 띠게 된다. 뒷날 목호의 난에서 보듯이 말 목장을 운영하는 몽골의 자손들과 섞여 살면서 어쩌면 자치와 자율의 시절을 지냈을 수도 있겠다. 최소한 중앙정부에 의한 가혹한 수탈과 부역의 노역은 면했을 것이다. 물론 목호의 난 이후 제주민들은 고려정부군의 무차별적인 살육으로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이처럼 기록에 의하거나 중앙정부의 섬을 대하는 인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배의 실상을 보면 양반문화 선비문화의 전래는 허구일 수 있겠다. 설사 믿고 싶은대로 그것이라 하더라도 흔히 말하는 선비정신 저항정신 등의 유배문화 또한 유교적 양반문화의 지배 질서를 그대로 따르거나 까다로운 제사 풍속에서 보듯이 오히려 껍데기만 가져와 오버한 연장선에 있음이 분명하다.

예컨데 북쪽의 조정을 그리워하는 연북정의 정서는 뭍으로 진출하거나 재기를 꿈꾸는 퇴물벼슬아치의 것이지 제주민의 것일 수 없다. 어쩌면 유배지 제주는 또다른 정신적 유배의 인식을 강요받는 건 아닐까.

선비의 핏줄이든 도적이든 오랑캐의 그것이든 무슨 피가 섞였니, 혈통이 어쩌니 하는 말은 삼가시라. 까짓 개도 안 물어갈 핏줄보다 당시 주민들의 생활이 훨씬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 옛날 거제도가 대마도와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냈던 것처럼. 

2016년 12월 13일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앞에서 난징대학살 79주년 추념식이 엄수됐다.
지난 2016년 12월 13일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앞에서 난징대학살 79주년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제주투데이DB)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천 년 전 지금, 오백 년 전 지금, 또 현재 살아 펄떡이는 지금 여기 주민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뭍에 것들이 누가 귀양 와서 살았든 말든, 몽골의 오랑캐가 지배하고 피가 섞였든 말든, 중앙집권이 강화되고 지배체제를 위한 군현이 들어서고 단단해지든 아니든 그게 제주도민들의 삶에 도움이 되면 옳은 것이고 그게 아니면 그른 것이다.

불행히도 역사가 전해주는 사실은 주민들을 짓밟고 옥죄는 쪽이었다. 또 가까이 일제강점기와 4·3과 한국전쟁에 의한 ‘피해(이 말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누가 다른 적확한 말로 바꿔주시라)’는 어찌하는가.

#왜 제주가 평화의 섬인가

다시 지금이다. 강정에 언제든 미군이 장악할 수 있는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성산에 공군기지가 확실시되는 제2공항을 만들려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평화의 섬에 동북아의 화약고가 될 전쟁기지를 세울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주민들의 삶터에 전쟁의 맨앞줄에 배치될 군함이며 전투기를 배치한다면 가장 먼저 타격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중앙정부에 복속된 이래 제주가 평화의 섬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앞의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이 늘 수탈과 살육과 억압과 전화(戰禍)의 고통을 이고 온 섬이었다. 일제 때는 중국본토를 폭격하는 전진기지로, 일제의 최후항전을 대비한 옥쇄방어의 거점이 되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이다. 평화의 섬이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평화를 위해,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은 전화의 억울하고 원통한 피해와 희생의 고통스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지난 역사를 딛고 새로운 평화의 장을 열기 위하여.

평화의 섬이 아니라 너무도 평화가 간절한 섬 제주. 이 땅의 역사가 일러주는 손짓이고, 지금 여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덧, 제주역사에 관한 지식이 얕으므로 잘못된 사실에 대하여 지적해주면 고맙겠다. 물론 이를 근거로 한 주장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성홍. (사진=정미숙 작가)
이성홍. (사진=정미숙 작가)

제주에 살러온 8년차 가시리주민이다. '살러오다', 한 때의 자연을 벗삼고 풍광을 즐기고자 함이 아니라 끼니를 챙기고 텃밭을 일구고 호롱불 아니라도 저녁무렵 은근한 난롯가에서 콩꼬투리를 까고 일찌감치 곤한 잠들어 내일의 노동을 준비하는 생.활.자, 그리 살고싶다, 그리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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