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함. (사진=김지민)
다양한 사회 메시지들이 붙어 있는 영국의 한 전기함.  (사진=김지민)

 

내가 항상 지나다니는 길목에는 검은색의 전기함이 있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을 법 하지만 의외로 그 전기함은 꽤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전류 위험을 경고하는 표시 위로 낙서들과 스티커들이 지저분하게 붙어있다. 낙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스티커들은 무엇을 광고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 그 옆을 지나가면서도 시선이 머물렀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평소와는 다른 스티커 하나가 눈에 띄었다. ‘FREE HONG KONG(광복 홍콩)'이라고 하얀 글씨로 파란 바탕에 쓰인 글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때는 한창 홍콩에서 중국 정부의 국가보안법 제정 때문에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홍콩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인 네이선 로 (Nathan Law)가 런던으로 망명을 와 있었다.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름의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를 기억하고 그때의 노래를 불렀지만, 그 부름에 우리는 제대로 연대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이렇게 홍콩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어쩐지 모를 반가움이 들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응원을 하며 그 스티커에게 한 번이라도 더 눈짓을 주고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 스티커는 며칠 지나지 않아 더 이상 그 전기함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으레 스티커를 떼어내면 남는 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처음 들었던 감정은 경악이었고 이어서 드는 감정은 슬픔에 준하는 씁쓸함이었다. 마치 대학 시절 학교 정문에 게시되어 있곤 했던 대자보가 훼손된 듯한 느낌이었다. 환경미화의 목적으로 떼어냈다기엔 다른 스티커들과 낙서들은 그대로 지저분하게 남아있었다. 누가 왜 떼어냈을까.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런던은 몇 번의 록다운(봉쇄령)을 거쳤다. 전기함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었고 스티커들과 낙서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전기함뿐만 아니라 그 옆의 가로등들도 피해를 면치 못 했다. 내용인즉슨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팬데믹은 가짜이며 언론의 세뇌라는 것이었다. 스티커들은 마치 그 개수로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겠다는 듯 여기저기 정신없이 붙어있었다. 이걸 떼어버려야 하나,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거기서 그걸 떼어내고 있으면 와서 때릴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들어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스티커들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왜 그 스티커들 중 한쪽은 응원을 하고 한쪽은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누가 붙였든 간에 두 스티커 모두 붙인 사람의 ‘의견’을 담고 있고, 그것을 주창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가 아닌가? 표현의 자유 (Freedom of speech)는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권리 중 하나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처럼, 두 스티커는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다. 특히 후자의 경우 방역에 적극적인 방해를 하므로 그 위험성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단순히 스티커를 붙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방역 수칙은 무시한 채 시위를 벌여 지역 사회를 심각한 감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또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데, 나의 친구가 비슷한 일을 목격했다. 공원에서 조깅을 하다 봉쇄령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보았는데, 당연하게도 마스크를 아무도 쓰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시위자들은 마스크를 쓴 사람들에게 다가와 마스크를 억지로 벗겨 내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뉴스를 확인한 결과 일부 시위자들로 인해 몇몇의 경찰들 또한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진실’을 주창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라고 믿었겠지만 그 표현이라는 것이 가짜 정보를 퍼트리고, 특정 대상을 혐오할 경우 존중받을 수 없다. 더군다나 실제로 자행된 폭력에 대해서는 비난을 면치 않을 수 없으며 법적 처벌도 피할 수 없다. 가짜 뉴스 유포자 및 음모론자들은 무시가 답이라는 사람도 있다. 관심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생성하고, 유포하고 그리고 믿는 사람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무시해도 괜찮을까.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를 내버려 두는 것처럼, 대책 없는 방치도 옳은 답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들은 그러한 음모론을 믿고 적극적으로 전파하기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사회를 살고 있는 구성원이기에 그들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한 사람의 ‘신념’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누군가는 이것이 쓸데없는 소모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장 나부터도 나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 그 방법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서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며 함께 잘 살아가자는, 그래도 좀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결코 쓸데없는 노력이 아닌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지민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제주 4·3에 대해 연구 중인 김지민은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와 런던을 잇는 [지민in런던]은 매월 둘째주 게재된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