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어?” 

해군기지 안으로 몸을 날렸다. 관함식 기간이었고 해외 군함들이 민군복합형관광미항에 가득 정박 중이었다. 민간인 출입 행사 기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출입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때는 깊은 밤이었고 가을밤은 추웠다. 군대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들어간 나는 큰 소리로 시위했다. 사람을 찾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잠든 운동장에다 호소했다. 

관함식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관함식 진행을 위해 육지 등에서 임시로 파견된 군인들이 많았다. 강정마을 사람들은 기만적으로(이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하겠다_) 강행된 관함식을 반대하며 해군기지 앞에 집회 신고를 내고 해당 신고 물품을 들였다. 그런데 처음 보는 젊고 건장한 남성 수십명이 갑자기 해군기지 안에서 줄지어 나오더니 다짜고짜 물건을 뺏고 시민들을 고착했다. 아마도 해군 측은 강정의 활동가들과 주민들을 관함식 동안에라도 치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더래도 집회 신고된 물품을 파손하고 참가자들을 겁박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해군기지 앞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을 생중계하며 동료시민들을 불렀다. 황급히 사람들이 계속 도착했고, 시민과 그 젊은 남자들(나중에 군인들로 밝혀졌다)의 대치는 밤새 이어졌다. 정말 해군기지 정문을 경계로 군인과 내가 한 뼘 사이로 마주 보며 밤을 새우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날도 아침은 왔다. 밤샘 대치에 모두 이성을 잃었다. 양쪽이 서로를 적군처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선지 모포 한 장 지급하지 않고 추운 밤에 군인들을 방치했던 군대 측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진 듯했다. 그토록 단단하던 어깨들이 모두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기지 정문 근처에서 실랑이하던 나와 친구들이 선을 넘어 기지 안쪽으로 쏟아졌다. 친구들은 모두 일어나 서둘러 상황 종료된 기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카메라를 지키느라 세게 넘어졌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군인이 내 앞에 바로 서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일어나시죠 엄.문.희. 선생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처음 보는 이 사람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걸까? 

“당신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어?” 

내가 묻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떨렸다. 이것은 협박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이유로든 나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지금 과시하고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 엄청난 위계가 만들어졌다. 짧은 순간 생각했다.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면 나는 앞으로 해군기지 문제에 맞서 싸울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이 들었다. 이 상황은 참고 견디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이 야만스러운 시간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문제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래. 난 엄문희다. 엄. 문. 희. 네가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래 나는 엄문희다. 당신에게 이름을 알려준 적 없고, 내 친구들도 여기선 한 번도 내 본명으로 부른 적 없지만, 당신은 나를 알고 있고, 내 이름을 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어. 나를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 당신 행동의 목적인 걸 나도 알지. 그래서 당신은 비겁한 거야. 알아? 나에 대해 알고 있음을 과시하는 거잖아? 그게 얼마나 비겁한 일인지, 부끄럽지도 않아?”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협박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해당 군인의 비겁함을 계속 반복해 외쳤다. 기어이 그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가 정색하며 기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다른 군인들이 붙들어 기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분노로 떨면서도 그가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나는 적어도 지지 않았으므로 한 단계를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비겁한” 이란 말을 백 번은 했던 것 같다.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아무도 날 말리지 못했다. 나의 이런 모습에 친구들도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절대 과하지 않았다. 험악한 상황을 피해가기 위해 놓쳐온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과하지 않았다. 오늘 내가 저 군인의 비겁함을 폭로하지 않는다면 저 사람은 다음에도 다시 똑같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군대 전체가 저런 행위쯤은 당연하게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막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 저 사람을 쓰러뜨려야 했다. 

관함식 기간 내내 광난 눈으로 그를 찾아다녔다. 그를 마주쳤으나 그는 군대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도망쳤고 나는 붙들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관함식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간을 놓치면 그는 다시 육지로 돌아가고 나는 그를 영영 마주칠 수 없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몸을 날려 기지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관함식 행사에 참여하려고 부대에 들어서는 시민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시민들 발 앞에 누워서 몸부림을 쳤다. 결국, 경찰의 중재로 관함식 마지막 날에 그 군인에게 사과를 받았다. 

진심 어린 사과였다. 나는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만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진심으로 사과해버렸다. (이 과정을 말로 표현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너무도 중요해서 나는 조만간 이 과정을 쓸 생각이다) 그의 사과를 받고 제일 먼저 18살 딸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울었다. 사실 내가 그 군인을 찾아다니며 급기야 기지 안으로 몸을 날려 밤샘 투쟁을 하고 기어이 사과를 받으려 했던 이유는, 기지 밖에서 내 손을 잡아준 초등학생 아들 때문이었고, 그날 그 아침에 엄마가 당한 모욕을 기지 밖 철문을 붙들고 지켜보았던 딸 때문이었다. 1년 전 2017년 가을, 막 17살이 된 내 딸이 해군들에게 받은 성희롱 때문이었다. 딸아이는 그들에게 사과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누군가는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해군기지 철문 사이로 마주 선 채 밤을 새운, 그건 정말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가을밤 복판에 끌려 나온 우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강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누군가는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해군기지 철문 사이로 마주 선 채 밤을 새운, 그건 정말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가을밤 복판에 끌려 나온 우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진=엄문희)

(2) 딸이야? 예쁘게 생겼네?

딸 아이가 해군기지 앞에 올 때마다 단속했다.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내 딸인 거 알아서 좋을 게 없어.” 
“응. 알지.”

그런데도 결국 해군이 고용한 경비용역은 내 딸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딸이야? 예쁘게 생겼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가 뭔데 우리 딸을 입에 올려?’ 그러나 생각뿐, 아무 말 못 했다.

육지에서 대안학교를 다니던 아이는 결국 엄마와 살겠다며 짐을 옮겨왔다. 첫 계절이 다 끝나지도 않아 아이는 생에 첫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마을 안 편의점 계산원으로 일한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집에 돌아온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성희롱“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후에서 저녁까지 일하는데, 마감하기 직전 늦은 밤에 해군 대여섯이 편의점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미 얼굴이 벌게지게 고깃집에서 반주했던 것 같은 그들은 맥주를 몇 캔 더 샀다고 했다. 막 17살이 된 딸 아이는 움츠러들었고 목소리도 크게 못 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편의점 안에서 맥주캔을 땄다. 점원은 점포 실내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를 금지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들은 채 만 채 계속 술을 마셨다. 그 과정에서 한 남자군인이 아이에게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그리고 모욕적인 말이 청소년 여성 노동자에게 던져졌다. 혼자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켰다. 무서웠다고 한다. 그들은 마시다 만 맥주캔 과자봉지를 그대로 테이블에 두고 떠났다. 퇴근을 앞둔 아이는 그것을 마저 치웠다. 어두운 길을 따라 집으로 오는데 다리가 풀리더란다.

아이의 피해를 듣고도 나 역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한편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이에게서 황급한 전화가 다시 왔다. 자기 앞 시간에 일하는 아르바이트 여성 노동자분이 알려준 것에 의하면, 해군 측에서 아이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인상착의를 들어보니 해군이 고용한 경비였다. 와서는 물건도 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계산하고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아이가 당했다는 일에 관해 물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이의 피해에 관해 짧게 페이스북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그 시간에 일하던 아르바이트 점원은 나도 알고 지내는 내 또래 여성이었다. 협박에 협박이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도 이미 겁을 먹은 상태였다. 처음엔 상황을 잘 묘사해주며 함께 해군을 비판했는데, 아이가 당한 일을 증언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부터 태도를 바꿨다.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꼬지 당할까 봐 무섭고 싫으니 연루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서운했다. 한편은 그 두려움이 이해되었다. 점주에게 연락했다. CCTV 영상을 확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가해자가 군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이랬을까? 해군기지는 이미 준공됐고, 마을은 군대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고, 군대는 또한 마을의 주요 고객이었다. 게다가 가진 힘은 마을이나 개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정도 피해는 그냥 지나가길 바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렵게 CCTV 영상을 확인한 건 녹화가 자동 삭제되기 50분 전이었다. 여러 사람이 우르르 들어와 맥주를 마시는 것도, 어떤 남자가 아이 앞에 서 있는 것도 보였다. 그들이 나간 자리를 힘없이 치우는 청소년도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 날 찾아온 한 남자가 보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손님이 들어오자 멀찍이 떨어졌다 다시 와서 이야기를 거는 남자는 우리가 잘 아는 해군 정문의 그 경비가 맞았다.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강정마을회와 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대책위가 함께 준비한 기자회견에 아이 대신 내가 증언했다. 나의 증언이 나오자 다른 친구들도 자신들의 경험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이가 당한 성폭력 문제 말고도 해군이 마을 주민을 사찰한다는 정황을 알리고 마을 안 주요 위치를 비추던 해군의 감시카메라 문제를 함께 고발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기사는 해군이 마을 사찰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친구들과 함께 만든 영상엔 그 해군경비용역이 편의점에 찾아와 점원과 대화하는 영상 등이 찍혔고, 성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이 있었으나, 마을주민사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사건은 주민들을 쫓아다니던 해군의 카메라 방향을 바꾸고 고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아이의 일이 너무 무거웠다. 실은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더 밀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기자들 앞에서 아이의 피해를 말하는 그 자리의 무거움은 설명하기도 어렵다. 아이는 엄마에게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을공동체에 더 질문하지 못했다. 아이가 그 일로 상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숨을 죽였다.

5학년 아이가 화난 새‘ 모자를 쓰고 기지 앞에 와서 펜스 문 너머에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누군가에겐 협박받은 한 여자가 곤조를 피워 사과를 받아내려는 고집쯤으로 보였겠지만, 당시의 나는 내 존재를 다 걸고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슬픈 사진, 내가 아는 가장 슬펐던 날이다.
5학년 아이가 화난 새‘ 모자를 쓰고 기지 앞에 와서 펜스 문 너머에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누군가에겐 협박받은 한 여자가 곤조를 피워 사과를 받아내려는 고집쯤으로 보였겠지만, 당시의 나는 내 존재를 다 걸고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슬픈 사진, 내가 아는 가장 슬펐던 날이다. (사진=엄문희)

(3) 내가 아는 가장 슬픈 사진, 내가 아는 가장 슬픈 날

잊고 있었고, 잊고 싶었던 기억이 기지 안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조롱하던 군인의 한마디 때문에 되살아났다. 그를 다시 마주친 건 해군관용차를 타고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내가 분이 풀리지 않는 이유. 그건 그가 군사기지라는 성역을 들락날락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때도 그는 기지 안에서 나를 조롱했고, 내가 그에게 항의하려 하자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선을 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미숙했던 나는 이해라도 한다지만, 포기했던 나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깊은 밤, 기지 안에 들어가 잠든 군대를 깨우며 외쳤다. 

”알다시피 저는 해군기지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군을 이루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불신이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인간을 믿고, 개개인 당신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없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사용하지 않는 군대라는 조직의 모순에 질문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이 사과해주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다 알죠? 나에겐 아이들이 있고, 지금 저 문밖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들어오지 못한 채로 엄마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여성 혼자 남은 상태에서 조용히 다가와서 알려주지도 않은 이름 불며 협박하는 일이 얼마나 비겁한지, 스스로 반성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들과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기회입니다. 나는 내 활동의 정당성을 위해 당신들의 군대가 나를 방치하기 보다는 내 불신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배웠습니다. 위협하지 않을 의무, 용서를 구할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배웠습니다. 우리 안에 살고있는 그 인간을 찾아냅시다”

“여기 아이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엄마를 모욕한 아저씨가 나와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함께 삽시다. 이대로 한 엄마가 아이 앞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군대로부터 사과도 못 받고 우는 모습을 보이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건 당신들과 나 모두의 패배입니다. 사과를 받기 전엔 끝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당신들은 각오해야 할 겁니다. 당신들의 어머니를 기억하란 말입니다.”

물론 그는 그 밤에 나오지 않았다. 새벽 1시경 아이가 기지 앞으로 또 찾아왔다. ‘화난 새’ 모자 쓴 아이가 그 와중에도 귀여워서 혼났다. 그래서 더욱 내 발로 나갈 수는 없었다.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는 곳. 나는 아이 때문에라도 꼭 사과받고 싶었다. 내 아이들에게 협박받고 겁먹은 엄마가 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군인들이 ‘사과 안 하는 사람들’이라고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엄마는 ‘군인 개인’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사용하지 않는 군대라는 구조’와 싸우는 것이란 걸 알려주고 싶었다. 마을 친구에게 부탁해 안 가겠단 아이를 돌려보냈다. 꼬맹이가 뒤돌아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또 소릴 질렀다. 그날은 미군의 핵추진항공모함이 강정 해군기지에 처음 입항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노예상 콜럼버스가 1492년에 아메리카 원주민 땅에 말뚝 박은 날이기도 했다. 2018년 10월 12일의 일이다.

이제라도 해군에게 사과받고 싶다. 그때 그 해당 군인을 색출해서 군대라는 거대한 모순에서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겪은 일도, 내 딸이 겪은 일도 군사주의의 작동 방식 안에 존재한다. . (사진=엄문희)
이제라도 해군에게 사과받고 싶다. 그때 그 해당 군인을 색출해서 군대라는 거대한 모순에서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겪은 일도, 내 딸이 겪은 일도 군사주의의 작동 방식 안에 존재한다. . (사진=엄문희)

(4) 해군, 사과해주세요

나는 현재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며 공권력에 격렬히 저항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얼마 전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그 과정에서 법원에서 등기가 오는데도 매번 받지 못하고 있다. 다음 주에 법원에 가서 직접 받을 계획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신고된 주소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해군에게 성희롱 당한 이후 아이는 살고있는 집 주소를 누가 아는 것에 극도로 민감해졌다. 누구에게도 집 주소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거주지를 옮겨 이사했음에도 주소지 변경신고를 하지 않고 마을 안 내 사무실 주소로 그냥 두었다. 한번은 잘 아는 분이 귤 한 상자를 우리가 사는 집에 보낸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떻게 우리 집에 택배가 올 수 있느냐?” 였다. 심지어 해당 귤 농장에 전화해 우리 주소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기에 이르렀다. 

어렵게 다시 아파트 단지 편의점에서 일했는데 거기서도 또 성폭력을 당했다. 그 노인은 자주 밤마다 왔었다 한다. 어느 날엔가 아무도 없는 밤에 계산대에 서 있던 아이의 손을 꽉 잡은 남자는 “나는 늙었으니 미투 아니겠지?”라며 히죽거렸다 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라면을 먹었다니, 얼마나 모욕적이고 무서웠을까. 아이는 그 노인이 라면 먹는 사이 내게 문자를 했고, 나는 아이의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이는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다. 

갑자기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어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놀라워했다. 자기도 지금 그때 겪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는 그 생각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밤, 오래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이의 동의를 받아 이 글을 쓰게 됐다. 4년이 지났고, 아이는 이제 만으로 스무 살이다. 며칠 전 육지에서 학업을 하겠다며 올라갔다. 아이가 떠나던 아침에 많이 울었다. 아이는 그 사건을 이제 직면하기 시작했음을 나에게 알렸고, 이 글을 함께 썼고, 송고를 미루며 한 달을 더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나도 아이에게 사과했다. 

돌아보면 나도 여러 번 성폭력을 경험했다. 그러나 피해당사자로서 나는 힘껏 싸우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은 사과했으나 내가 문제를 회피했고 없었던 일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나를 버렸고, 수치심은 내 몫이 되었다.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다 결과적으로 참담하게 나까지 잃는 패배를 맛보았다. 사실 가해자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험을 피해 다녔다.

다행히 나는, 나를 협박했던 군인과 마주 앉았다. 처음에 그는 얼어붙은 채로 “제게 들어야 할 말이 있으시다구요.”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윽고 헤어질 시간이 되어 그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하고. 그랬더니 그 군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선생님이 밤새 기지 안에서 외치는 소릴 들었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괴로웠습니다. 저야말로 선생님께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애써주셨고, 이렇게 사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가 사과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죄송했습니다.”

이미 눈물이 고였을 것이다. 나도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더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싸울게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분노로 활활 탈 뻔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다시 기지 선을 넘어 들어갔고 나는 다시 바깥에 남았다. 나는 가끔 그가 궁금하다. 떠오를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코를 팽 풀고 있다. 아이는 여전히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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