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으로 물든 보리밭 풍경
금빛으로 물든 보리밭 풍경. (사진=제주투데이DB)

5월 중순이 되면 내 고향은 청순했던 녹색 들판이 누런 갈색으로 바뀐다. 그러면 종이에 싼 개역을 보릿대로 빨다가 사레들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아버지와 같이 마셨던 시큼한 순다리가 그리워진다. 

‘개역’은 볶은 보리를 갈아 물에 타 먹거나 밥에 비며 먹는 제주 음식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보통 쌀이나 찹쌀가루에 콩가루 등을 섞어 미숫가루를 만들지만 쌀이 귀한 제주에서는 보리로 미숫가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보리조차도 조냥(오늘보다 내일을 생각하며 절약하는 것) 허명 살아야 했던 제주에서는 “한 달에 개역 세 번, 조배기(수제비) 세 번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개역도 고급 간식이었다. 

우리 고향에선 보리장마 후부터 더위가 가실 때까지 개역을 먹었다. 우리집에서 개역 먹는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역에 물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숟가락으로 젖은 개역을 걷어내며 젖은 개역과 마른 개역을 돌돌 말아 먹는 것이다. 둘째는 식은 보리밥에 비벼서 먹는 것이고, 셋째는 냉수에 타서 질게 해서 마시거나 되게 해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다. 넷째는 우무묵(우뭇가사리 묵) 국에 개역을 풀어서 먹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종이봉지로 개역을 싸고 보릿대로 빨아먹는 것이다. 이 방법은 주로 아이들이 이용하였다. 

어머님은 여름철이 되면 식은 밥에 누룩과 물을 발착발착하게 섞어 항아리에 밀봉해 두셨다. 이삼일 정도 지나면 보글보글 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순다리다. 순다리는 단술도 막걸리도 요구르트도 아닌 제주 특유의 저알콜 음료다. 주세법상 주류는 주정과 알코올 분 1도 이상의 음료로 정의되기 때문에 순다리도 엄연히 주류에 속한다. 

아버님은 순다리 마시는 것으로 노동으로 지친 몸을 푸셨다. “시원하다”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그때는 그 소리가 순다리를 두고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본인의 몸을 두고 한 말임을 깨달았다. 

순다리. (사진=플리커닷컴)
순다리. (사진=플리커닷컴)

필자는 10살부터 순다리를 마셨다. 형이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아버님의 대작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아버님은 순다리를 마시면 엄격함이 풀어져 ‘권학가’나 ‘타향살이’ 등을 부르거나 필자에게 국군도수체조를 가르쳐 주셨다. 

필자도 술이 거나하면 그 노래들을 흥얼거리곤 한다. 어찌 보면, 보리를 생산하고(1차 산업), 순다리를 제조해서(2차 산업), 순다리를 마시며 노래하는 체험을 했으니(3차 산업) 필자는 농업의 6차 산업화를 어릴 적부터 체험한 셈이다.

박근혜 정권부터 농업의 6차 산업화가 화두가 됐다. 1차 산업은 자연에서 생산·채취하는 것이고, 2차 산업은 가공·제조하는 것이며, 3차 산업은 유통·판매, 체험·관광, 외식·숙박, 치유·교육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1차, 2차, 3차를 합하면 6차가 된다. 농업의 6차 산업화는 농촌 주민이 중심이 되어 농촌의 유·무형 자원을 바탕으로 2·3차 산업을 복합적으로 연계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6차 산업화는 국민들의 농업·농촌의 가치에 대한 인식변화, 대량생산·소비에서 소량생산·소비로의 변화, IT(정보통신기술), NT(Nano Technology·나노기술), BT(Bio Technology·생명공학기술) 농업과 융·복합되는 요인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면에는 농업 자체만의 소득으로는 농촌은 유지될 수 없고, 농촌 인구감소·고령화 및 자본주의화로 악화된 농촌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농업영역의 확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더 단순히 말하면 6차 산업화 정책은 농업 자체의 경쟁력이 없다고 정부가 자인한 결과물이다.

6차 산업화를 통한 소득 창출과 마을 공동체 회복의 대표적 사례로 임실치즈마을이 거론된다. 임실치즈마을은 치즈로 대표되는 임실의 명성을 이용하여 마을운영위원회 중심의 치즈 가공 체험을 추진하여 연 30억원의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 사업을 통하여 치즈마을 57가구 중에서 14명의 자녀가 마을에 정착했고, 1983년부터 친환경농업을 도입하여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실치즈마을의 성공 뒤에는 1959년 임실성당에 부임하여 치즈 만드는 법을 가르치면서 자립을 역설한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와 1972년부터 ‘우리는 한 몸입니다’란 모토로 지역공동체 활동을 전개한 심상봉 목사의 헌신이 숨어 있다. 필자는 스스로 서고 더불어 나누는 60년 이상 만들어진 전통이 임실치즈마을을 성공하게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제주도에서 농촌융복합(6차)산업 인증을 받은 업체는 114개소다. 그러나 신효마을의 ‘귤향영농조합’을 제외하면 개인 농가이거나 영농조합 또는 주식회사다. 농촌 주민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면서 농촌공동체를 회복하자는 정책 취지와 달리 농업 외 소득 창출 쪽으로만 사업의 균형추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주도에서는 관광농원으로 45개소를 지정하였는데, 그 중 11개소가 운영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녀와 나뭇꾼’, ‘한울랜드’, ‘선흘캐릭월드’와 같이 농원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사업체도 버젓이 지정·운영되고 있다. 농업·농촌·농민은 없고 돈만 있는 6차산업화의 슬픈 현실이다.

녹색이 지면 봄날도 간다. 누렇게 물든 보리밭에서 “사랑은 변하지 않아, 사람의 마음이 변했을 뿐이지”란 영화 대사가 들려온다. 그리고 필자도 안간힘을 다해 대사를 날린다. ‘나와라 돈 세계 밖으로, 함께 가자. 사람 세상 속으로’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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