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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우다]치켜세우기와 깎아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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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우다]치켜세우기와 깎아내리기
  • 에밀리
  • 승인 2021.05.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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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분야 인권교육 공부모임을 하고 있다. 자료를 읽고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눈다. 지난 번 주제는 인종차별이다. 제주 출신 친구의 동생이 베트남에서 온 친구와 결혼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동네 삼촌들이 결혼잔치에서 신부를 보고 ‘한국사람처럼 생겼다, 예쁘네요’, ‘베트남사람 안 같다, 예쁘고 괜찮네요’ 같은 외모 ‘칭찬’을 아무렇지도 않게 많이 했단다. 흔히 볼 수 있는 피부색, 경제적 차이 등과 연결된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설지 않다. 나도 여러 번 들어본 말이기 때문이다. 황색 피부를 가진 나는 여기서 한국 출신이 아니라는 배경을 한눈에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래도 말을 나누게 되면 처음으로 만난 한국 사람한테 ‘말도 잘하고 한국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공통점의 발견으로 반가움과 안전감을 느끼는 경험이 아주 보편적이라고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외모 평가와 한국사람이라는 틀에 대해서 답답한 심정이 된다.

이런 말을 할 때 애매한 칭찬 같기도 해서 알게 모르게 다른 다양한 모습을 깎아내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국 사람처럼’ 생긴 나에 대한 칭찬은 나를 비추고 있지 않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칭찬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또 이 말에 주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집단인 한국사람들인데다가 획일적인 외모평가를 보니 순혈주의도 들어갔으리라 추측해본다. 우월함의 행사이면 한 사람의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의식적 집단적 힘의 행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안전하지 않은 느낌이 들곤 했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비교의 대상으로서 이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어느 한국 친구랑 같이 있는데 나보고 한국 사람처럼 생겼다며, 함께 있는 다른 한국 친구에게는 오히려 중국/대만사람처럼 생겼다고 했다. 무슨 뜻일까? 말하는 사람의 의도는 칭찬과 비하라고 딱 잘라 판단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묘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부 모임을 하는 멤버 중 일본에서 15년 동안 살다온 황색 피부를 가진 한국(?) 친구가 있는데 본인이 일본에서 겪은 암암리의 차별의 경험을 나눠주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서로 비슷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여러 친구랑 같이 (일본)친구 집에 놀러 갔다. 자신 빼고는 다 일본친구였던 상황이었다.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는 친구의 부모님이 그를 보더니 “너는 말하는 것도 그렇고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일본 애랑 다른 게 없네, 전혀 한국사람 같지 않네”라는 말을 칭찬이라고 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막 눈물을 흘렸고, 모두가 당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이런 말을 칭찬으로 하다니 너무 기분 나쁘고 억울한 심정이 든다”고 그 자리에서 표현했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다문화 인권교육 기본교재』에서 ‘한국인들이 이주민을 차별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과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 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소위 황색피부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말들이 오가니 마음이 ‘답답하다’, ‘억울하다’와 같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오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자기도 모르게 몸으로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국적이나 민족과 같은 집단적 정체성 자체가 보편적으로 역사적/사회적 트라우마의 내면화로 강화된 것을 보아오기도 했고, (국제)사회에서는 경쟁의 문화가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집단적 정체성을 내세울 때 (개인은) 안전하지 않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적 정체성의 분단이라고 표현해본다. 
 
집단적 정체성의 분단은 타자화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타자화한다는 것은 특정한 공통점을 이용 혹은 강화하거나 만들기도 해서 집단성을 확보하고, 집단에 대한 자긍심까지 키우는 행동이다.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 열심히 우월함의 명분을 만들고 치켜세우려는 노력을 한다. 이는 어쩌면 빈번하게 차별을 경험하는 (국제)사회에서 차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내세우는 수단인 것은 아닐까 싶다.

유치원에 다니는 6살 어린이가 학교에서 가지고 온 키즈토리 역사교육 교재를 살펴봤는데, 역사를 배워야 하는 여러 이유 중 “우리나라에 대해 자긍심을 갖기 위해“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모든 어린이가 학교에서 배우니까 또래의 강력한 공통점이 된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는 것은 치켜세우는 연습이다. 그 반대는 깎아내리기이다. 치켜세우기와 동시에 깎아내리기가 만들어진다. 한국 학생들은 자긍심을 갖기 시작하고 소위 다문화 출신 학생들은 점점 자랄수록 그 치켜세우기가 초래한 깎아내리기를 느끼게 되면 정체성 분단의 불편함과 심하면 고통까지 겪을 것이다. 
 
정체성의 분단은 대놓고 차별을 하는 명시적 인종차별 그리고 자신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암시적 차별까지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타자화를 통해 만들어진 타자에 대한 깎아내림과 자신을 치켜세움으로 벌어진 그 간극은 우리가 서로 분단된 거리다. 분단의 간극이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이 닫혀있는 것만으로도 차별을 야기할 수 있다. 서로 분단 되어 있는 닫힌 정체성 자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이미 차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주분야 인권교육은 닫힌 정체성을 열리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본다. 즉 정체성의 분단현상을 인식하고 다루어야 하며 정체성의 분단을 당연하다고 여길 때 평등에 대해 내세우는 '실패적이고 비현실적인 대체 방식'도 함께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실패적이고 비현실적인 대체 방식'이란 자긍심 키우는 교육을 말한다. 각자의 자긍심을 갖는 일로 열등감을 해소하고 서로 평등해지기를 바랬을 텐데 안타깝게도 우월함과 열등함의 경쟁에서 잠시의 무승부가 있을 수 있더라도 평등은 존재하지 않다. 그래서 자긍심을 갖기보다도 긍정하는 연습을 서로 평등하기 위해, 연결되기 위해 경쟁을 멈추기 위해 꼭 필요한 연습으로 여긴다. 

우월감과 열등감의 작동으로 만들어진 자긍심을 통해 집단적 정체성에게 특별함을 부여해준다면 긍정연습으로 통해 깨워준 모든 이들의 존엄함으로 집단적 정체성의 닫힌 문을 열어주고 서로 연결되어 가면서 함께 평범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평범해진 우리는 평등해질 것 같다. 누가 다른 '누구들'처럼 생겼다는 것보다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원래 그렇게 닮아있다는 것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에밀리
에밀리

글쓴이 에밀리는 대만 출신이다. 제주에서 정착하기 전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랬고, 지금 제주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제주에서 아이를 낳았다. 육아에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다 쏟아붓는 일상 속에서 제주의 '인간풍경'을 글에 담고자 한다. 이 땅의 다양성을 더 찬란하게, 당당하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달 마지막 주말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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