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쫓아간 곳에선

송당마을이 고향이랬다. 그곳은 두말할 필요 없는 신성의 발원지다. 선흘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익히 알려진 금백조며 소로소천국의 본풀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송당마을에 있다는 오봉이굴왓, 그곳에 가면 여신 설문대가 거대한 솥을 안쳤던 화덕의 받침돌이 있을 것이란다. 어린 날 당신께서 고향마을에 살 때에는 그 바위를 ‘새덕앚인밧’이라고 불렀다며 지금은 아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음표는 그길로 송당마을을 찾았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새덕앚인밧의 정체를 탐문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포기하려던 차에 전 이장이 마주쳤다. 물음표의 입에서 새덕앚인밧이라는 말이 새어나오자 그이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어디서 들었느냐며 손수 길잡이를 자청했다.

경계심과 달리 상당히 친절한 전 이장이 인도한 곳은 마을 동쪽 오름길로 알려진 16번 국도변이었다. 도로의 배수로와 맞닿은 밭 가장자리에 멈춰선 전 이장의 눈길로 지목한 곳엔 얼핏 대형세탁기 크기의 바위 서넛이 흙더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전 이장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송당리 오봉이굴왓에 있던 새덕앚인밧(사진=한진오 제공)
송당리 오봉이굴왓에 있던 새덕앚인밧(사진=한진오 제공)

그에 따르면 애초부터 이 바위들이 이런 모습은 아니랬다. 커다란 바위 셋이 삼각의 대열로 곧추 서 있어서 커다란 솥을 안치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해설이다. 그런데 몇 해 전 도로공사를 하던 와중에 바위의 내력을 모르는 이들이 훼손한 것을 여태까지 손을 못 대고 있었다.

물음표는 비로소 전 이장이 내비친 경계심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설문대의 권능이 담긴 성물이 방치되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마을 안에도 이 전설을 아는 이가 드문데 외방에서 낯선 사람이 찾아왔으니 마음 착한 양반은 그 짧은 시간에도 큰 시름에 빠질 수밖에.

친절한 전 이장은 조만간 새덕앚인밧을 복원할 계획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혼자 남은 물음표는 한참 동안 나뒹구는 바위를 하나하나 매만졌다. 설문대가 솥을 안쳐 불을 지폈던 온기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그리하라 시키는 것 같았다.

새덕앚인밧, 그리고 샛손당 세명주

알다시피 구좌읍 송당리는 제주도 당신앙의 여러 메카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큰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개성 송악산 백모래밭에서 솟아났다는 여신 금백주가 천기를 살피다 멀리 바다 건너 제주섬 송당리에서 솟아난 소로소천국을 발견했다. 자신의 천상배필이라고 여긴 금백주가 소로소천국을 찾아와 혼인하니 둘 사이에서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이 태어났다.

장성한 자식들은 제주도 북동부 일대로 흩어져서 자손을 낳으니 금백조 부부신의 손자만도 일흔여덟에 이르러 그들 모두 여러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제주도 마을 신 중 절반이 이들 가문인 셈이다. 수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부부신은 식성이 다른 것이 불씨가 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금백주는 웃손당, 소로소천국은 알손당의 당신으로 신권을 나눠 남남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송당리 본향당 본풀이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본풀이 구송을 채록한 여러 이본(異本) 중 하나에는 “웃손당 금백주, 샛손당 세명주, 매알손당 소로소천국”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은 리사무소 일대에 마을이 밀집해 있지만 과거에는 세 곳의 자연마을로 나뉘어 있었던 사실에 근거해 신앙권역을 반영한 구절이다. 웃손당과 알손당의 신은 앞서 살펴본 부부신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샛손당 세명주는 낯설다. 금백주가 소로소천국의 첫 번째 부인이고, 세명주가 두 번째 부인이라고 전하는 본풀이도 있지만 여기까지가 그에 대한 정보의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샛손당 마을에 좌정한 여신이라는 세명주는 과연 누구일까?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지만 연구자들은 설문대의 수많은 이름 중에 세명주도 포함된다고 한다. 마을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를 정도로 다양한데 세명주라는 이름도 제법 많이 분포한다. 이를 새덕앚인밧에 이어보면 샛손당의 세명주가 설문대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침 새덕앚인밧이 자리한 오봉이굴왓 또한 옛 샛손당마을에 속한다. 지금은 마을까지 사라진 마당이라 증명할 수 없는 추론에 지나지 않지만 지나친 억측은 아니라고 여긴다. 앞으로도 계속될 설문대루트 탐사길에서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아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겠다.

송당리 마을 안으로 옮겨져서 복원된 새덕앚인밧(사진=한진오 제공)
송당리 마을 안으로 옮겨져서 복원된 새덕앚인밧(사진=한진오 제공)

설문대와 솥덕바위

물음표에게 복원을 말했던 이의 약속은 실현되었다. 새덕앚인밧의 솥덕바위가 송당 마을 안 아부오름을 향하는 사거리로 자리를 옮겨 복원되었다. 튼튼한 안내판도 내걸렸다. 마을의 성물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었다는 반성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서 정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아쉬움도 그 못지않게 솟아오른다. 하필이면 복원을 해놓은 장소가 마을의 클린하우스와 나란히 붙어 앉은 소공원이다. 마땅한 부지를 고르고 고른 끝에 선택한 곳이겠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쓰레기장 곁에 부엌이 있는 셈이라고 새된 소리를 쏟아낼 만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 바위가 설문대의 전설을 품은 것이라는 안내판의 설명이다. 눈에 거슬릴 정도가 오타가 많고 비문도 더러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주의 수많은 설문대 전설지 대부분이 그런 것과 비슷한 사정이다. 설문대 전설지의 자연물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너도나도 명승지로 칭송할 텐데 그런 곳이 거의 없다. 드러나는 외형에만 몰두하는 세태가 제아무리 설문대의 신성이 깃들었다고 한들 멋지지 않다면 관심 밖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아쉬움을 뒤로 물리고 도대체 설문대는 무슨 이유로 제주섬 곳곳에 화덕을 만들어 커다란 솥을 걸고 불을 지폈을까를 짐작해본다. 어떤 이는 즉각적으로 오백 명의 아들을 위해 죽을 쑤다가 빠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을 떠올릴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한라산이 용암을 토해내던 시절을 반영한 전설이며 커다란 무쇠솥이야말로 마그마가 철철 넘치는 분화구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다. 정답이 명료한 수학 공식이 아닌 이상 특정한 해석을 놓고 틀렸거나 맞았다며 판정을 내릴 수 없다. 하필이면 화덕의 받침돌인 솥덕을 이 바위들에게 덧씌웠을까?

등경돌, 두럭산, 공깃돌바위, 엉장메코지 등 다양한 메타포로 속뜻을 숨긴 설문대 전설지들이 있다. 새덕앚인밧과 같은 솥덕바위도 여럿이다. 곽지리의 외솥바리와 삼솥바리, 그리고 지금은 제주공항의 활주로에 깔려 영영 사라지고 이야기로만 남은 또 다른 솥덕바위의 사연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설문대의 전설지들이 자연물이며 대다수가 바위라는 이유로 원초적인 자연숭배, 거석숭배라고 코멘트했지만 하나하나의 속뜻들을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 듯하다.

물음표의 여정을 따라가며 앞서 살펴봤던 등경돌과 두럭산, 등경돌은 씨줄과 날줄을 엮는 직조를 통해 자연의 시공간의 창조한 뒤 그것의 질서를 잡는 여신의 행적을 담아낸 메타포였다. 두럭산은 자연계의 존재들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것을 헤아리라는 여신의 메시지를 담은 곳이었다. 이처럼 설문대의 전설지들은 저마다 드러나는 이야기 너머에 또 다른 메시지들을 숨겨놓고 있다. 솥덕바위 또한 그러하다.

하여 설문대루트를 탐사하는 물음표는 자신의 이름을 빼다 박은 의문부호를 배낭 가득 잔뜩 우겨 담고 섬 곳곳을 헤매고 있다. 섬 서쪽 곽지리에서 다시 만날 솥덕바위 앞에서 여전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돌아설 지도 모를 일이다.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한진오는 제주도굿에 빠져 탈장르 창작활동을 벌이는 작가다. 스스로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무허가 인간문화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자신의 탈장르 창작 활동에는 굿의 ‘비결정성’과 ‘주술적 사실주의’가 관통한다고 소개한다. 저서로 제주신화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한그루, 2019),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걷는사람, 2020)가 있고 공저로 ‘이용옥 심방 본풀이’(보고사, 2009) 등 다수가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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