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장촉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를 서쪽에서부터 한바퀴 돌면서 벌어진 일을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1702년에 제작한 《탐라순력도》는 〈한라장촉〉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림은 철저하게 육지의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아래쪽이 북쪽이다. 아래엔 왼쪽부터 장흥 완도 해남등이 보이고, 위에는 왼쪽부터 일본, 베트남, 말라카, 항주 등이 보인다. 제주도가 아시아 대양의 중심으로서의 가치도 엿볼 수 있다.
한라장촉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를 서쪽에서부터 한바퀴 돌면서 벌어진 일을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1702년에 제작한 《탐라순력도》는 〈한라장촉〉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림은 철저하게 육지의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아래쪽이 북쪽이다. 아래엔 왼쪽부터 장흥 완도 해남등이 보이고, 위에는 왼쪽부터 일본, 베트남, 말라카, 항주 등이 보인다. 제주도가 아시아 대양의 중심으로서의 가치도 엿볼 수 있다.

승려 자장이 당에서 귀국할 무렵인 643년 봄에 신라는 9월 위기설에 휩싸였다. 삼국은 농업국가이다 보니 추수가 끝나면 전쟁이 시작된다. 추수가 끝나는 9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이 위아래로 신라를 공격할 것이란 공포에 신라인들은 떨었다. 선덕여왕은 그 길로 자장을 찾았다. 자장은 경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9층탑을 황룡사에 쌓을 것을 건의했다.

9층탑은 신라를 괴롭히는 주변의 아홉 오랑캐를 의미한다. 신라를 벌벌 떨게 한 이 아홉 오랑캐의 나라 중 하나가 탁라 즉 탐라**이다.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절실한 사람이 이기는 법, 신라는 결국 당을 끌어들여 삼국통일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탐라도 결국엔 신라에 조공하게 된다. 그래도 신라보다 탐라는 무려 170년을 더 독립국으로 살아남았다. 

그냥 섬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았겠지, 무슨 나라씩이나, 그러니까 한국사교과서에서 취급하지 않은 것이겠지. 진도나 거제도처럼 말이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당시의 나라는 근대의 민족국가라기 보다는 부족국가 혹은 변한·진한·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의미했다. 소국인 탐라국은 서기 1세기경에 탄생했다고 한다. 2세기 초까지만 해도 신라의 본가인 사로국이 진한의 12개의 소국 중 하나에 불과한 꼬꼬마시절이었으니 그 정도면 탐라국이 쩌리**급은 절대 아니었다. 

백제는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정복한 소국의 추장들인 왕, 신지, 읍차 등에게 일종의 귀족작위를 주었다. 그것이 좌평, 달솔, 은솔 같은 작위로 우리가 알만한 말로 바꾸면 공작, 후작, 백작에 해당한다. 처음으로 백제에 조공을 바치러간 탐라의 사신은 은솔의 작위를 받았고, 탐라국의 왕은 스스로를 좌평이라 했다. 따라서 탐라와 백제와의 관계는 독립성을 보장받은 일종의 공국쯤 되는 셈이다. 

삼국통일전쟁의 와중에서는 균형감각과 외교력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신라, 당, 백제부흥군, 일본 등이 얽히고설킨 이 시대에 탐라는 눈부신 정보력을 바탕으로 전쟁에 휘둘리지 않았고, 당에서 열린 제천의식에 참가했을 때는 서열이 일본보다 위였다. 그리고 독립국이었다는 것도 이것으로 확인이 된다.

신라의 우세가 점쳐지던 문무왕 때엔 재빨리 관계를 터서 국제정세에 뒤처지지 않았다. 고려가 새롭게 한반도의 강자로 부상하면서부터 사신을 주고받았고 고려 국가축제인 팔관회에 참석했을 때도 송, 여진과 함께 환대를 받았다. 일본과는 무려 서른 번의 왕래기록이 있고 중국과도 교류를 했다. 이렇게 주변 강대국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함으로써 선진문물을 얻었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손바닥 보듯이 보았다. 그 결과 탐라국의 평화가 천년을 갈 수 있었다.

오수전
오수전 제주시 건입포는 탐라국이 외부와 교역을 하던 항구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때인 1928년에 산지항을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던 중 오수전, 화천, 대천오십, 화포등 중국화폐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 화폐들이 사용되었던 시대가 오수전은 B.C118~621이고 화천은 왕망이 만든 것으로 사용시대가 아주 짧아 서기 14~40년에 불과한 것들이라 탐라국 초기에 활발한 해외교역을 증명해준다. 사진은 제주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오수전이다.

1105년에 고려의 지방인 탐라군으로 편입되면서 탐라천년이 막을 내렸다. 고려는 1223년에 토착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바다건너 큰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하지만 제주라는 이름은 철저하게 뭍에서 본 관점이다. 제주에 살면서도 ‘바다건너 살아요’라고 대답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물론 그때도 (아마도) 그렇고, 지금도 (아마도) 이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주라는 이름에 딴지를 건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제국 원을 세우고 난 뒤 쿠빌라이 칸은 제주 섬에 당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첨단방위산업단지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말목장인 목마장이다. 제주의 기후는 말을 키우기에 가장 알맞았으며, 게다가 바다의 관문이다. 여기서는 아시아 어느 나라로든 진출할 수 있다. 원은 제주를 고려에서 떼어내서 직접 자신들의 직할통치령으로 삼았다. 제주가 독립된 지역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려 중심의 지방이름인 제주를 버리고 탐라총관부라고 이름을 짓는다. 다시 탐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원의 멸망으로 다시 제주로 바뀐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토록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개되던 세계사의 격전장이었건만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탐라에 대해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옥저, 동예 같은 나라에 대해서도 배웠지만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조차 탐라라는 나라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완벽하게 잊혀져버렸다.

물론 탐라국의 힘의 크기를 보여줄 고분이 없었고, 자신의 역사서가 없었으며, 강력한 정복활동을 통해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않았기에 삼국에 들이대기엔 모자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건국신화와 이 신화를 뒷받침할 유적과 유물이 있으며 고유의 언어,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에서 이두를 배워와 행정에 활용했을 정도로 조직화된 사회였고, 왕위를 자신들의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세습하였던 점에서 하나의 왕국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독립국으로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와 무역을 이어나갔다. 그 정도면 너, 인정! 하고 하나의 나라 역사로 받아줄만하지 않은가.

**탐라라는 이름은 ‘탐’은 섬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고, ‘라’는 신라의 ‘라’에서 보는 것처럼 너른 벌판이나 지역을 뜻하는 말인 나, 노, 내, 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된다. 

**쩌리: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비중이 적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매월 첫째주 수요일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예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