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장(사진=이상영 선흘2리장 제공)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장(사진=이상영 선흘2리장 제공)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눈이 떠졌다. 깨어나자마자 선흘2리 전 이장 생각이 났다.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라는 마을회 결정을 뒤집고 찬성측으로 돌아선 이유가 고작 3000만 원도 안 된다는 공소장 내용이 나름 충격이었나보다. (관련기사 ☞ 원희룡 지사 면담 하루 전날 '뒷돈' 받고 마을 배신한 선흘2리 전 이장)

선흘2리 전 이장과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지인이 오갈 데 없을 때 1년 여 정도 자신의 집 방 한칸을 흔쾌히 내준 분이다. 처음 제주동물테마파크를 둘러싼 선흘2리 갈등상황을 접했을 때, 단번에 그분이라 생각 못했다. 사실상 선흘2리 실세라 불리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제주서부경찰서가 해당 사건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 지난 1월이다.(관련기사 ☞ 선흘2리 전 이장 기소?) 취재 당시 내용확인을 위해 서부서를 찾았지만 경찰은 ‘피의사실 공표죄’를 이유로 입을 열지 않았다. 해당 사건이 5개월간 검찰 캐비닛에 있는 동안, 사업자로부터 2억원 가량을 받았다가 일부 돌려줬다는 제보를 받기도 했다. 월급의 100만원 씩 저금한다고 치면, 20년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처음 2억 원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제목도 플롯도 기억나지 않는 형편없는 영화였지만, 극중 인물에게 주인공을 배신하라고 종용하는 장면은 기억에 남아 있다. 바로 대사 때문이다. 극중 인물이 "나는 친구를 배신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 악당이 “네가 아직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받아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는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결국 친구를 배신한다.

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만, 그래 2억원이라면 혹 할 만도 하다. 당시 고민 끝에 이장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는 돈을 받은 사실을 부인했다. 부인하면서도 “죄가 있다면 죗값을 치러야지요.”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장의 목소리에서 영악하지 못한 엄마의 '서툰 살이'가 느껴졌다. 엄마는 종종 지인에게 다단계 물건을 사오고 뒤늦게 후회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현명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상황이 자기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이 있다. 임계 안에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지만, 임계를 벗어나면 상황에 끌려다닌다. 선흘2리 전 이장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평소 잘 알고 있는 분께 전화를 걸었다. 어떤 인물인지 묻자 “순진한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가 겹쳐보인 이유일거다. 선흘2리 전 이장은 당시 통화 말미 미혹했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3일 공소장 내용을 보도하고 방을 빌려 쓴 지인에게 “양심을 판 돈이 고작 3000만원이었다”고 하자 “어쩌다…이장님이…”라며 씁쓸해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가 아니라 한 사람을 '더는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만든 상황'과, 그 상황을 장악하고 있던 더 큰 힘에 대한 무기력한 분노에서 비롯한 씁쓸함이었다. 

제주도가 동물테마파크 사업변경 승인조건으로 주민협의를 내걸자, 사업자는 반대대책위 위원장이던 이장을 돈으로 매수했다. 돈을 받은 이장은 "마을회가 개발사업에 찬성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달라"는 사업자의 부정청탁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제주도에 '찬성위원회 결성'이란 공문을 보냈고, 제주도는 '찬성위원회 결성'을 '마을이 사업에 찬성한다'고 일반화하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상하다. 누군가를 품을 줄 알던 한 사람은 이제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됐는데, 상황을 ‘제작’한 이들은 여전히 뜻대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소장을 어떻게 받았냐며 언론에 항의를 한 사업자와,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펼쳐온 주민과 활동가를 배제한 채 ’강정마을 상생협약식’을 밀어붙이고 있는 제주도. “책임을 통감하고 갈등을 치유한다”는 도정홍보를 그대로 복붙한 언론들.

강정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도정이 개입한 사실과 '민군복합형관광미항 환경영향평가서 협의내용 동의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원희룡 도지사와 좌남수 제주도의회 의장이 스스로 인정했지만, 그걸로 끝.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해군기지는 버젓이 건설됐고, 정당성을 요구한  송강호 박사는 현재 감옥에 있는 이상한 세상.

자본권력은 고작 3000만원으로 한 사람의 양심을 샀고, 마을권력은 고작 3000만원으로 마을과 가족을 팔았다. 국가권력은 싸게 사들인 공문을 사업승인 명분으로 활용하려다 막혔다. 선흘2리 이장에게 돈을 건네며 "편의를 봐달라"고 말한 건, 사업자일까. 제주도정일까. 

이장의 말을 복기한다. “죄가 있다면 죗값을 치러야지요.” 그게 누구든. 더도 덜도 말고 딱 죄의 무게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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