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20세기》김재훈 지음, 휴머니스트
《친애하는 20세기》김재훈 지음, 휴머니스트

애장품을 수집하는 편은 아니지만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몇 개의 박스에 따로 모아두고 있다. 대청소를 한답시고 켜켜이 먼저 쌓인 박스를 끄집어내면 대청소가 끝나는 시점은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 하루를 넘길 수도 있다. 박스에 담긴 물건 중 다이어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1995년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2005년 무렵까지 썼으니 장장 10년에 달하는 나의 시대가 거기 기록돼 있다. 나의 그 시기를 뭐라 불러야 할까. 오늘 소개할 책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친애하는 20세기의 마지막 장’이라고나 할까.

나의 기록에 따르면 1995년은 '창간의 해'였다. 명불허전의 영화 잡지 《키노》가 창간됐고, 《씨네21》의 전통 역시 같은 해에 시작됐다. 영풍문고에서 《키노》를 산 다음, 마로니에 공원 앞 KFC에서 콜라를 마시면서 읽었고, 교양과목 수업을 빠지고,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봤다고, 기록돼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표지가 보이도록 가슴에 끌어안고 지하철을 탔고, 읽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어떤 글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미디어오늘》도 같은 해에 창간됐다. 현재는 인터넷 미디어로만 발행되고 있지만, 본래 오프라인 매체로 출발했다. 학교 도서관 앞에 뭉텅이로 놓인 《미디어오늘》을 집어서 친구들과 나눠 읽었고, 동아리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는 받침대 대신으로도 썼다.

나의 변변찮은 일기가 아니더라도 20세기는 매체의 시기라고 할만 했는데, 잡지 출간사로 보자면 20세기의 출발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창간과 함께 시작이 됐다. “격동의 20세기를 생생하게 기록한 포토저널리즘의 정수, 보도사진의 금자탑을 세운 잡지 《라이프》”도 20세기의 물건이다. 윈스턴 처칠, 아이젠하워, 맥아더, 존. F 케네디, 마틴 루터 킹, 김구 등이 《라이프》의 모델이었다. 물론 그것은 20세기가 전쟁과 더불어 굴러간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마릴린 먼로와 히치콕, 비틀즈 등의 인상적인 화보들도 《라이프》에서 만들어냈다. 《라이프》의 발행인은 미국의 잡지왕 타이틀을 차지했던 헨리 루스였는데, 《타임》, 《포춘》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나의 친애하는 20세기의 물건 중에는 씨디와 씨디 플레이어도 있다. 당시 학교 앞 음반 가게에서는 공씨디(이 표현이 왜 이렇게 낯설지? 설마 나만 아는 단어인가?)에 원하는 노래를 녹음해줬다. 그러니까 이문세의 4집의 ‘사랑이 지나가면’과 5집 ‘광화문 연가’, 이승환의 ‘천일동안’과 자우림의 ‘헤이헤이헤이’ 같은 곡들을 하나의 씨디 플레이어에 다 담아서 소장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자기만의 주문제작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그리고 이 인물 얘기를 해야 한다. 친애하는 크럼! 내가 출판사에서 밤샘을 하고 있을 때, 그때 사장은 미국의 풍자만화가 로버트 크럼의 책 몇 권을 몇 년 동안 고민했다. 크럼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유용할까? 이 변태스럽고 괴짜 같은 인물과 그의 표현이 과연 돈이 될까? 그런 질문들이 편집회의에 여러 차례 올라왔다.

우리는 로버트 크럼을 감당하지는 못했지만, 20세기의 상징적인 출판물인 펭귄북스에는 도전해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날개가 없는 페이퍼백 단행본을 흉내내보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중을 위한 값싸고, 휴대하기 편하고, 시리즈의 체계가 잡힌 가로 105mm, 세로 148mm 문고판의 대명사” 펭귄북스가 거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친애하는 20세기》를 읽다보면 지금 내가 이런저런 추억팔이를 했던 것과 유사하게 각자의 친해하는 20세기 이야기들이 줄줄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다이어리 같은 건 쓰지 않는다. 핸드폰에 간단히 메모하는 정도에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씨디 플레이어를 틀어놓는 일도 거의 없다. 스트리밍이 있으니까! 하물며 책방 주인이 전자책을 음성으로 듣고 있을 때도 있는 걸. 그런데도 일단 나는 다이어리를 버리지는 못하고 다시 담아 둔다. 가끔씩 이렇게 대청소의 어느 시간에 위로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다이어리와 옛날 음반들을 모아둔 박스를 책장 구석에 밀어 넣은 순간 좀 놀랐다. 나의 추억들을 보관하고 있는 박스 역시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20세기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플라스틱! 20세기를 방부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절대적인 이유! 친애하는 나의 20세기여, 친애하는 나의 플라스틱이여! ㅠㅠㅠㅠㅠㅠㅠㅠ!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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