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급진성》스레츠코 호르바트 지음, 변진경 옮김, 오월의 봄
《사랑의 급진성》스레츠코 호르바트 지음, 변진경 옮김, 오월의 봄

 

지금 여기에서 폴리아모리가 발화된다는 것은, ‘사랑-혁명 전선’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지금 사랑이 막 재발명되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제주투데이에 실린 한 기사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 폴리아모리Polyamory에 관한 기자들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형식에 담아 올린 것인데, 읽고 나자 몸과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폴리아모리 혹은 사랑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어졌다. 좋은 글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하게끔 만드는 것! 그래서 이 글은 그 기사(☞[제투수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하나의 댓글 정도로 읽혔으면 한다.

폴리아모리. 세 명이 서로, 동시에, 공개적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다. TV 막장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불륜이나 삼각관계가 아니다. 사랑의 한 방식이다. 3이라는 숫자, 그리고 동시성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나는 짐작한다. 다른 말로 하면, 독점하지 않고 공유되는 사랑 정도가 될 듯싶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랑이다. 주변에서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말해볼 수는 있을 듯싶다. 가령, “너라면 어쩔래?”라는 보편적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적어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늘 수다쟁이가 될 준비가 된 선수들이지 않은가! 김현식도 <사랑 사랑 사랑>에서 노래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그것이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야.”

다시, 폴리아모리. A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 B가 있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해 삼수 끝에 겨우 입학했다. 죽마고우들이 마련한 입학 축하 자리에 자신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A의 친구 C와 B가 눈이 맞았다. B는 A와 이미 오래 전부터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이별을 유예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B와 C는 가까워졌고, 연인이 됐다. 하지만 C는 A와의 우정 때문에 B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러나 C의 그 이성적 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봉인이 풀리자 B와 C는 열렬한 사랑을 했고, 열렬한 만큼 A와 B, A와 C의 관계는 철저히 파탄 났다. B와 C는 고향 친구들에게서 망명했다.

만약 이들이 그 스무 살 즈음에 폴리아모리를 알았다면, 과연 그들은 서로 잘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을까?

다음, 사랑과 혁명. B와 C는 각자의 공간에서 데모를 했다. 두어 번 시위에 빠지고 데이트를 즐겼다. 그때마다 각자의 선배들에게 죽도록 혼났다. 혁명과 사랑은 부대꼈다. 어느 날 B가 말했다. “나 M 선생과 결혼할래!”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려서는 안 됐다. M 선생은 마르크스였다! C는 1987년 6월에 군대에 갔고, B는 이듬해 졸업했고 또 얼마 있지 않아 결혼했다. 상대는 고향 선배의 대학 동기였으며, 소문자 m이었다.

만약 B와 C가 《사랑의 급진성》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고할 수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까?

“'사랑이냐 아니면 혁명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동시에) 아주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는데, 그 답은 바로 ‘사랑과 혁명’이다. 오직 이 관계에서만 사랑의 진정한 급진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다음, 사랑의 재발명. 《사랑의 급진성》의 작가는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 그밖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여기에 시인 랭보가 등장한다. 그가 말했다. “알다시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사랑의 급진성》은 사랑과 혁명의 닮은꼴에 주목한다. 그 요지는 사랑의 본령과 혁명의 본령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껏 밀어붙여서 말해본다면, 사랑에 빠진 자는 혁명가여야 마땅하며, 사랑을 말하는 자 역시 혁명가여야 옳다는 것이다. 내친김에 조금 더 나아가 말해본다면, 지금 여기에서 폴리아모리가 발화된다는 것은, ‘사랑-혁명 전선’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지금 사랑이 막 재발명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어쩌면 그 사랑이 당신 차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내 차례는 아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차례. 20세기 자본주의가 키운 전형적인 모범시민인 나 말고, 당신! 시인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꿨다”라고 썼다. 시인 나희덕은 “방도 못 바꾸고 가방만 바꿨다”라고 또 썼다. 나는 기껏 덧붙여 “가방도 못 바꾸고 핸드폰 충전기만 바꿨다”라고 쓸 뿐인데.

그러니 혁명은 안 되고 방도, 가방도 못 바꾸고 핸드폰 충전기만 바꾼 나 말고 당신의 차례! 나의 아들과 딸, 나의 마지막 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인 아내에게 “사랑해, 넌 내거야!”라고 말하는 나 아닌 당신! “폴리아모리? 사랑아, 미안하다.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이다. 나는 이미 낡았다.”라고 말하는 나 말고! 실연에 아픈 D여, 모태솔로인 E여! “당신들이라면 어쩔래요?”

P.S.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때? 돌아온 답. “나? 나도 나를 사랑해. 난 내거야.” 거 참. 양희은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에서 그랬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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