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자료사진. (사진=제주투데이DB)
수국 자료사진.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의 장마철은 산수국이 빛나는 계절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검은 숲속에 다발로 피어나는 산수국을 보노라면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퉁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라는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이란 시가 떠오른다.

이어서 열 살 때, 아버지 따라 모슬포에 갔다가 필자를 빨아들일 것 같은 미 여군의 파란 눈동자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손을 잡았던 기억이 떠오르고,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키가 작든 크든, 눈동자가 검든 파랗든,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겉모습은 도체비 같은 거다.”

씨를 남기는 것이 식물이 사는 이유다. 속씨식물은 곤충을 이용해 꽃가루받이를 한다. 산수국의 진짜 꽃은 너무 작고 꽃잎도 없어 곤충을 불러 모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산수국은 진짜 꽃 가장자리에 커다랗고 화려한 헛꽃을 피워 곤충을 유혹한다. 

수정이 되면 헛꽃이 뒤집어진다. (사진=고기협 제공)
수정이 되면 헛꽃이 뒤집어진다. (사진=고기협 제공)

우리가 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헛꽃은 암술과 수술이 없다. 꽃받침이 ‘삐끼’ 역할을 하기 위하여 화려한 헛꽃으로 변신한 것이다. 산수국 세계에서는 미와 부를 다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화려하면 자식을 가질 수 없고, 자식을 가질 수 있으면 보잘것없다.

수국은 아예 진짜 꽃을 없애고, 헛꽃인 꽃받침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피어나도록 개량한 원예종이다. 그래서 수국은 생식 자체가 불가능해 씨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수국에는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 

산수국은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하늘로 향해 피었던 헛꽃을 뒤집는다. 중매쟁이를 유혹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했으니 헛꽃을 세우는 데 힘을 쓰지 않고 뒷면에 있는 엽록소를 이용해 광합성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게 해야 나비들을 수정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보낼 수 있다.

산수국의 헛꽃 색깔은 자라는 땅의 산도에 따라 변한다. 산성일수록 파란색을 띠고, 중성이면 하얀색, 염기성일수록 붉은색을 띤다. 리트머스시험지로 산성 용액인지 염기성 용액인지 알 수 있듯이 꽃 색으로 토양의 산도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토양 산도를 조절하면 다양한 꽃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산성 토양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산수국은 대체로 파란색을 띤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산수국 꽃이 파란 도깨비불을 닮았다고 ‘도체비 고장’이라고 불렀다. 

산성 토양에서 자라는 파란 산수국(왼쪽)과 알칼리성 토양에서 자라는 분홍 산수국(오른쪽). (사진=고기협)
산성 토양에서 자라는 파란 산수국(왼쪽)과 알칼리성 토양에서 자라는 분홍 산수국(오른쪽). (사진=고기협)

제주지역 산림토양의 산성화가 심해지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제주산림 토양 산도(pH)는 2010년 5.14에서 2019년 4.30으로 낮아졌다. 산림토양 산성화의 주범은 대기오염에 따른 산성비이고, 산성비의 원인은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화석연료를 태울 때 발생하는 황산화물(SO2 등)과 질소산화물(NO, NO2 등)이다.

제주농토의 산성화도 진행되고 있다. 산성비, 화학비료의 과도한 사용, 강우에 의한 양이온 용탈이 주원인이다. 황산암모늄, 과인산석회, 황산칼륨 등을 함유한 화학비료를 뿌리면 작물이 비료 성분을 흡수해서 황산이 토양에 남게 되고, 비가 오면 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등 양이온이 용탈되어 산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토양이 산성화되면 미생물 활동이 억제되고, 알루미늄 이온, 중금속의 농도가 높아져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된다. 토양 산성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화학비료 대신 유기질 비료 사용을 늘리고, 석회, 규산질 비료 등의 토양개량제를 주기적으로 시용해야 한다. 

화석 연료를 사용할 때 나오는 배기가스는 산성비를 만든다. (사진=플리커닷컴)
화석 연료를 사용할 때 나오는 배기가스는 산성비를 만든다. (사진=플리커닷컴)

하지만 토양 산성화의 주요 원인인 산성비 형성을 막지 못하면 농업인들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3년에 한 번은 석회 등 토양개량제를 뿌려주어야만 한다. 언제까지 도시가 농촌에서 만들어내 산소를 공짜로 이용하고, 공해를 유발하며, 토양 산성화를 조장하는 것을 두고 보아야 할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산성비가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발전소·공장·자동차의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 토양에 문제가 생기면 생태계와 먹거리가 위협을 받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야 지렁이가 살고, 지렁이가 많으면 땅심이 좋아져 작물이 튼튼해지고, 작물이 튼튼하면 농약을 덜 치게 되어 건강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다. 

서귀포 대정읍 안성리 마을 안길 수국길. (사진=고기협)
서귀포 대정읍 안성리 마을 안길 수국길. (사진=고기협)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는 모두가 다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모두가 자기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차단과 배제, 분리와 독점은 지금은 이익일 수 있어도 궁극에는 자신을 해치게 된다. 냉방기를 돌려 안이 시원하면 그만큼의 열기가 밖을 덥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안의 편익’ 발생과 ‘밖의 비용’ 부담에 대한 거래를 시장화하지 않는 반쪽짜리 자유시장 체제를 갖고 있다.

공정과 연대의 힘으로 산수국하면 파란 산수국이 아닌 흰 산수국을 떠올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산수국의 꽃말도 ‘변심’, ‘바람둥이’가 아닌 ‘진심’, ‘한결같은 사랑’으로 읽히기를 꿈꾼다.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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