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은영)
(사진=김은영)

몇 년째 맨해튼의 이민자들의 음식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인류학 논문을 쓰고 있다는 그녀가 뉴욕에서 사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보고 다녀야 할지 묻는 나에게 일단 맨해튼 곳곳에 있는 100년이 넘은 가게들을 가보아야 한다며 데리고 간 곳은 게이 문화로 유명한 그리니치빌리지의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에 있는 찻가게였다.  

<Mcnulty’s Tea & Coffee>, 오래된 초록색 칠 입구의 가게였다. 126년동안 맨해튼 사람들에게 세계 곳곳에서 온 고급 차들과 커피를 공급해 온 자부심의 이 가게는 직원이었던 웡형제가 1980년에 주인에게 매입했다는데, 내부구조는 물론 쓰던 기구들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쓰고 있는 듯했다. 

맥널티 가게 내부. (사진=김은영)
맥널티 가게 내부. (사진=김은영)

아름다운 도구들은 저절로 앤틱 장식물이 되니 굳이 치울 일도 아니긴 했겠지만, 변함없이 두고 있는 끈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주변에 엄청난 크기의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카페가 생겨도 매출이 줄어들 걱정은 하지 않고, 오히려 고급 커피에 대한 수요가 늘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웡 부자의 손님을 대하는 친절하고 익숙한 태도와 느긋하고 편안한 표정이 좋았다. 

우리가 어떤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런 오랜 가게들이 있고, 그 주인이 고객들의 얼굴과 이름, 애호하는 차의 종류를 기억해주고, 그 손님들의 가족들이 대를 이어 가게의 고객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곳, 사람 사는 냄새에서 느끼는 행복감, 그래서 나도 그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아닐까?

카페 주인. (사진=김은영)
카페 주인. (사진=김은영)

그녀가 커피콩을 사는 동안 감각 레벨의 수용성을 한껏 올려 가게 안을 둘러보았는데 빽빽한 진열대 사이 좁은 공간을 돌 때마다 가게만큼 오래됐을 금빛 저울, 차를 담는 낡은 틴들과 유리병, 커피 포대, 나무 선반 한쪽에는 한국의 인삼차 박스도 놓여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작은 호들갑도 떨며, 각 대륙에서 엄선해 들여온다는 차들의 이름표들을 천천히 살피며 읽어보다가 대부분이 블렌딩 차라는 것을 깨닫고는 126년의 전통도 시대의 빠른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어서 유행따라 커피도 팔게 되고 차도 블렌딩이 되어야 했구나 생각했더랬다.

(사진=김은영)
(사진=김은영)

맞는 생각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정조지 안에 소개된 측백잎차를 재현해 마셔보면서 그 생각이 영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차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차서 부풍향차보(이운해 1757년) 에 기록된 차는 여러 가지 향이 가미된 향차, 곧 블렌딩 차였다. 찻잎을 채취해서 특정 증상에 약효가 있는 향약을 더해 만든 일곱 가지 향약차이다. 떡차였다.

풍 맞았을 때: 감국(甘菊), 창이자
추울 때: 계피(桂皮), 회향
더울 때 :백단향, 오매(烏梅)
열날 때: 황련(黃連), 용뇌
감기 들었을 때: 향유(香薷), 곽향
기침할 때 : 상백피, 귤피(橘皮)
체 했을 때: 자단향, 산사육(山査肉)
 
기본인 작설차 6냥에다가 증세에 맞는 향약재 각 1돈씩을 넣어 달여서 먹는데, 가래가 끓는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뜨겁게 마시라고 되어있다. 최초에 차는 약효로 받아들여졌다. 감기나 설사를 멈추게 해주거나 소화를 도와주고 주독을 풀어주며 땀을 내게 해주거나 이뇨 작용을 도와주고 머리와 눈을 맑게 해주는 효용이 있어서 마시기를 권하기도 했지만 잠을 줄여주는 카페인의 역할을 높이 샀다는 것이 재미있다. 

온밤을 새워 학문을 하는 선비이거나 새벽닭이 울기 무섭게 베틀에 올라가는 여인, 아침저녁으로 심부름 다니는 자, 밤낮으로 관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차를 마셔라! 라며. 그래서 차는 잠을 쫓아주는 불야후(不夜候)라는 별명이 있었다. 

측백잎차를 만드는 과정. (사진=김은영)
측백잎차를 만드는 과정. (사진=김은영)

찻잎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차라고 부르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은 차대신 마시는 모든 약재 달인 탕류들을 차로 이름 해왔던 모양이다. 햇빛을 잘 받은 측백나무잎을 색이 바라지 않게 건조된 항아리에 담아 종이를 씌워 말리거나, 밥 짓는 위에 올려 쪄서 말린 다음 생강즙을 발라 다시 찌고 말렸다가 뜨겁게 우려 마신다. 

정조지에 나와 있는 측백잎차 만드는 방법이다. 마시면 편백 숲속에 앉아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특유의 정유향이 입안에 퍼지는 향 좋은 차이다. 측백잎에 코팅하는 방법으로 생강을 블렌딩했다. 차의 단점인 찬 성분을 보완하기 위해 흔히 생강이나 소금을 첨가해서 끓여 마시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측백잎에 생강즙을 코팅하는 방법도 블렌딩 역사의 산물이겠다. 

입가심이라는 말이 있다. 입안을 가시게 하는 아주 좋은 차이다. 향나무 잎으로 만들면 더 향이 진하다. 구상나무잎이나 편백도 좋을 것이다. 제주의 숲차로 이름하면 어떨까? 

마블에그. (사진=김은영)
마블에그. (사진=김은영)

그날 나는 맥널티 티샵에서 훈제 찻잎인 랍상소총을 샀다. 그 잎을 넣어 달걀을 조리다가 껍질에 균열을 내서 차향이 스미게 하고 무늬를 만드는 마블에그를 만들었다. 추억도 함께 블렌딩 되었다!

김은영 요리연구가(가운데).
김은영 요리연구가(가운데).






 

우리는 현재에 산다. 과거에서 발원해 끊임없이 흐르며 미래를 향한다. 잊혀져 가는 일만 가능한 흐름 속에서 음식도 그렇다. 냄비 안에서는 늘 퓨전이 일어난다. 잊어버린 현재의 것들을 통해 현재 음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도 의미있겠다. 최근 출간된 서유구 선생의 <임원16지> 중 '정조지'에 수록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맛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오래된 미래의 맛을 통해서. 

 

김은영 요리연구가.

코삿헌 음식연구소 운영. 뉴욕 자연주의 요리학교 NGI 내츄럴고메 인스티튜드 졸업.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