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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읽기]빨간 약이냐, 파란 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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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읽기]빨간 약이냐, 파란 약이냐
  • 삐리용
  • 승인 2021.06.2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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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문제》 카를 만하임 지음, 이남석 옮김/해제.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085
《세대 문제》카를 만하임 지음, 이남석 옮김/해제.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085
《세대 문제》카를 만하임 지음, 이남석 옮김/해제.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085

“뭐라고? 형님 세대는 이제 끝났으니 나보고 물러나라고?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곧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라고?”

삐리용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기 살기로 조직을 이만큼 키우고 만들어놨는데, 이제는 조직에서 나가란다! 용퇴 어쩌고저쩌고 한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인생무상도 이런 인생무상이 있을 수가 없다.

삐리용의 눈앞으로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팔청춘에 시작해 어언 30년. 이 바닥에서는 나름 ‘혁명가’로 추앙받아왔다. 맨날 싸움이나 일삼고 감옥이나 들락거리던 조직폭력배 세계를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판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조폭의 세계에 현실 정치를 도입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각 구역을 장악하고 있는 조직들을 하나의 당으로 삼고, 각 조직들의 대표들로 일종의 의회를 구성했다. 명예직인 의장으로는 제일 연장자인 짝코 형님을 옹립했다.

과정은 험난했지만, 성과는 분명했다. 피와 폭력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적어도 초보적인 민주주의 형식을 갖춘 우리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식빵 언니파도 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은 분명해보였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삐리용의 동년배 세대들의 적극적인 동시에 암묵적인 동의와 연대가 있어서 가능했다. 삐리용 세대는 청소년 무렵에 광주민주화 운동을 직간접으로 겪었고, 군사독재 시절을 혹독하게 경험했으며, 1987년 민주화 운동도 흥분과 더불어 체험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세상은 바뀐다는 것! 그 세계관 혹은 시대정신은 삐리용 세대의 전유물 혹은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동시대를 살았다 해도 생각이 전혀 딴판인 어깨들도 많았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는 게 혹은 바뀌는 방향이 못마땅하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시절이 아니라고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또다시 현실 상황이 달라지면, 볼셰비키에서 멘셰비키로, 소수파가 다수파로 언제든지 바뀔 수가 있었다. 무릇 세대들의 특징이 그랬다. 돌멩이를 던지던 자가 태극기를 들고, 촛불을 들었던 자가 음모론자가 되기도 한다.

광고기획자나 정치가들은 각 세대들의 이름표 만들기의 선수들이다.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어떡하든 한곳으로 모아야 상업적, 정치적으로 공략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세대들은, 정작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데, 한 철 유행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세대라는 것은 어쩌면 현실과 개념이 성기게 반죽된 상상의 집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또 하나의 세대가 등장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백팩을 매고 따릉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세대가 제1야당의 대표로 등장한 것이었다. 외골수 빠루 누님도, 팔공산 샌님 형님도 이제 마흔도 채 되지 않은 그와 맞섰다가 망신만 당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촛불혁명을 경험했고, 디지털 미디어가 DNA에 내장된, 랄프 로렌 티셔츠를 입고 정치 한복판에 나선 세대의 승리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이제 세대교체를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는구나. 삐리용 심정이 복잡했다. 공동체 속에서 세대가 오고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게 사회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삐리용의 눈에 그 세대는 정치적으로 분명한 보수였다. 그런 그들이 삐리용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크게 뒤집어 놓을 것이었다. 삐리용은 그게 불만이었고, 불안이었다. 그들은 의회에서도 늘 발목잡기로만 자신들의 존재를 줄곧 과시하고 있었던 제1야당의 새로운 얼굴들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의 대결에서 진보는 비틀댔고, 비틀대는 만큼 안팎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삐리용은 나름의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각제 방식을 대통령제로 바꾸고, 대통령에 도전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들만의 세계를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가역적인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삐리용 세대에게 부여된 마지막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삐리용과 삐리용 세대에게 제기된 용퇴 요구가 삐리용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말았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도, 독재자도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했다. 나의 이 바람은 과연 그들의 결단과 과연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 삐리용은 혼란스러웠다.

지난 시절에는 신념과 행동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변명이 아니라 이성이, 아집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했다. 나를 포함한 나의 세대가 정치 사회적인 쓸모가 다 했다면, 받아들여야만 한다. 소멸도 삶이다. 삐리용은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아직 그 시간이 아니라면? 미처 끝내지 못한 소명이 남았다면? 답은 쉽지 않았다. 잠시나마 노래에 마음을 실어볼까? 용필이 형님이 읊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라고. 희은이 누님은 이렇게 노래했다.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정해진 시간이 이제 다 됐다. 용퇴를 강권하는 아이들이 곧 내 방 문을 두드릴 것이다.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의 첫 소절처럼. 빠빠바밤~. 삐리용은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조용필이냐 양희은이냐!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내밀어진 두 약, 빨간 약과 파란 약, 어느 쪽이어야 하는 것일까?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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