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 관아의 영주관 터. (사진=고봉수)
제주목 관아의 영주관 터. (사진=고봉수)

제주북초등학교 동쪽, 조선 시대 객사 대청이었던 영주관 터.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왕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을 접대하고 묵게 하였던 곳이다. 영주관의 설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89년(숙종15) 이우항 목사가 다시 고쳐 지었고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고 한다. 제주공립보통학교(제주북초등학교 전신)가 1908년 이곳으로 옮겨져 영주관을 교실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영주관 터에는 교사(校舍)가 있었지만, 그 후 철거되어 전매청(KT&G 전신)건물이 세워졌다. 전매청 이전 후 2013년~2015년 발굴조사 결과 탐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토목, 건축 잔존물들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영주관 터를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수십 년간 빈터로(3531㎡) 보존만 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차라리 소공원을 조성해서 지역주민들의 쉼터로 활용하거나, 잔디 블록으로 포장하여 공용주차장으로 활용하면 어떨지….

사적(史蹟)으로 묶어놓고 보존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보자는 것이다. 문화재가 지역주민들의 삶을 유익하게 한다면 원도심 공동화 현상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며칠 전 부친과 제주의 옛 사진전을 관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친이 북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취학 학생 수보다 학교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지금의 ‘메가박스 제주’에 위치한 남초등학교는 일본인들이, 북초등학교는 조선인들이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취학 전 어린이들에게 무슨 시험을 봤을까? 필기시험이 아니라 면접으로 일본어 능력을 테스트했다는 것이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1년 후에 재응시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더 길어졌다면 우리말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겠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사진의 영주관 터 우측 건물은 4.3 당시 전남경찰청 산하의 ‘제주감찰청’이 있었던 곳이다. 다른 도의 경찰청보다는 한 단계 낮은 감찰청이 제주에만 만들어졌다. 발포사건이 일어났던 제주경찰서는 감찰청 산하의 제1구 경찰서이며, 서귀포지서는 제2구 경찰서이다.

원제국 총관부의 터. (사진=고봉수)
원제국 총관부의 터. (사진=고봉수)

제주북초등학교 북측 우체국 물류창고가 있는 곳은 원제국이 제주를 지배하던 시대의 총관부의 터다. 1273년(원종14)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주에 상륙한 몽골군은 삼별초를 전멸시킨 뒤에도 그대로 주둔하면서 다음 해 제주를 원의 직속령으로 삼는다. 

고려에 복속된 탐라는 말 진상(2000필) 요구에 불응하고, 이에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이 이끄는 대군(2만5000여 명)이 ‘목호의 난’을 진압할 때까지 99년간 제주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다. 당시 제주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라고 하니 진압의 대상이 목호뿐만 아닌 제주인 전체가 아니었을까? 

다른 지방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최영 장군 사당이 유독 제주도(추자도 제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최영 장군을 바라보는 제주인들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북신작로 인도. (사진=고봉수)
북신작로 인도. (사진=고봉수)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영뒷골을 향하는 제주목 관아 북측 도로인 북신작로 인도는 작년 도시재생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전신주 지중화 사업을 먼저하고 인도를 조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전신주 지중화 사업은 한전과 함께해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예산 집행의 시기 문제가 걸려 어쩔 수 없다면서 진행되었다. 

결국, 휠체어도 통과할 수 없는 인도를 만들어 놓았다. 전신주 지중화 작업 시에는 또 일부 철거하여 재시공하는데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지역의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관련 부처 간의 협의가 사전에 이루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4.3당시 제주 읍내에서 가장 큰 요정 '옥성정 터'. (사진=고봉수)
4.3당시 제주 읍내에서 가장 큰 요정 '옥성정 터'. (사진=고봉수)

 

제주목 관아 서쪽 돌담길에서 무근성으로 진입하는 도로변 창뒷골에 위치한 ‘옥성정 터’. 4·3 당시 강경 진압에 나섰던 9연대 박진경 대령 승진 축하연이 1947년 6월 17일 저녁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곳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박진경은 축하연을 끝내고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강경 진압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손선호 하사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의 나이 28세였고, 대한민국 육군장 1호로 장례가 치러졌다.

사건 이후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를 비롯한 범인들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에서 손선호 하사는 박진경을 살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박 대령의 작전 공격은 불만하였다. 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박살하였으며, 폭도의 처소를 안내하는 양민을 총살한 예도 많다. 또한,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하라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이 전연 없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5일, ’4명 총살 언도 / 태연한 피고, 박 대령 비행 진술‘)’
 
다음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문상길 중위의 법정 진술이다.

‘(전략)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240쪽)’

문상길과 손선호는 “훌륭한 조선의 군대가 되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35분 총살당했다. 그들의 나이는 각각 23세, 22세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옥성정’이 있던 곳에 정신병원이 있었다. 해가 진 저녁 시간에 무근성 친구 집에 가려면 좁고 어두운 이 올레를 지나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무서움을 떨쳐버리려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곤 했었다. 지금은 소방도로가 생기면서 추억어린 올레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2층 외벽에 문이 달린 수상한 집. (사진=고봉수)
2층 외벽에 문이 달린 수상한 집. (사진=고봉수)

그 올레에 소방도로가 생기면서 남쪽에 있는 건물이 잘려 나갔다. 그러다 보니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2층 외벽에 문이 달린 수상한 집이 되어 버렸다.

이 수상한 건물은 옛 탐라여관이다. 1960년대에는 영화 촬영차 왔던 박노식, 신영균 등 당대의 스타들이 묵었던 고급 숙소였다. 사진을 보면 2층 출입문이 있는 곳이 복도이고 그 좌·우로 방이 있는 모습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고, 건물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동양여관. (사진=고봉수)
동양여관. (사진=고봉수)

그 옆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동양여관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 방문 시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여인숙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장기투숙객들을 상대로 운영 중이다. 건물 내부에는 건축 당시 사용한 일본 목재가 그대로 남아있어 원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으나, 2016년에 소방도로가 생기면서 탐라여관과 같이 건물 일부가 잘려 외부 원형을 잃어버렸다.

제주도 세계자연유산본부와 문화재위원회, 건축학회 등 관련 기관들이 도내 근대건축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나갔으면 한다. 근대건축물을 등록문화재 지정으로 보전하면서 어떻게 활용할 건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관덕정 뒤편 공영주차장 서쪽에 있는 올레. (사진=고봉수)
관덕정 뒤편 공영주차장 서쪽에 있는 올레. (사진=고봉수)

이곳은 학창 시절 불량 학생들의 일탈 장소였던 관덕정 서쪽 올레다. 원도심의 공동화 현상으로 주변의 빈집들이 생겨나면서 이제는 원형을 잘 간직한 원도심의 올레가 되었다. 원도심을 안내할 때마다 이곳을 보여주면 모두 좋아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올레와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 멋진 작품이 된다. 원도심에 이런 올레가 남아있다니….

탐라여관이나 동양여관처럼 이곳도 소방도로가 생기면 이 모습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지방정부가 탐라여관과 동양여관, 그리고 이곳 올레 주변의 빈집들을 매입했으면 한다. 탐라여관과 동양여관은 등록문화재로 보호·관리하고, 정겨운 올레길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원도심이 신시가지와 다른 점은 역사적 장소와 흔적들이다. 역사적 장소와 흔적들을 잘 보존하고 활용한다면 지역주민들에게는 삶의 활력과 자긍심을 심어주고, 도민과 원도심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심 박물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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