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방문한 로버츠 장군(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었던 그는 한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송요찬 연대장은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런 사실이 신문과 방송 대통령 성명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선전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 바 있다. (사진=제주4.3평화재단 역사문화아카데미 자료집)
제주를 방문한 로버츠 장군(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었던 그는 한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송요찬 연대장은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런 사실이 신문과 방송 대통령 성명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선전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 바 있다. 송요찬은 제주 4.3 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주범 중 하나. (사진=제주4.3평화재단 역사문화아카데미 자료집)

고향을 떠나 살아보면 고향의 정취가 그립고 고향 소식이 반가워진다.

제주를 떠나 이민자로 살아온 지 21년이 넘었다. 같은 고향을 두고 있는 아내와 같이 제주 얘기를 할 때면 나이 들면 꼭 돌아가자는 다짐으로 대화를 마친다.

제주, 내 고향을 그려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어머니이다. 해 질 녘 노을이 진한 자두색으로 변할 즈음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모습. 흙으로 더럽혀진 몸빼와, 땀이 말라 하얀 소금기가 선명한 옷을 입은 모습. 지치지만 자식을 만나 기분 좋은 웃음으로 리어카를 끌던 어머니의 모습. 새벽과 밤에 항시 두시간씩 무릎을 꿇고 십자 상과 성모상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던 모습의 어머니.

착하고 강하고 신심 깊던 어머니는 밤에 자주 우셨다.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세상살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깊은 4·3의 상처 때문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4·3 유족들 모두는 밤마다 몰래 흐느끼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나 역시 지친 몸을 누워 옛날얘기를 하던 어머니가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 일이 4·3 사건인지도 모른 체…

철이 들고 대학에 입학해서야 어머님의 눈물이 4·3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북촌이 고향인 어머니는 아버지와 수많은 친척, 자신 빼곤 모든 소학교 동창들은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원통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무서운  마음을 가슴에 쌓고 살았으니 긴 세월 눈물 없이 어찌 그 한을 풀어냈겠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십 년이 지나가고, 제주 시민사회가 미국에 4·3을 알리려고 찾아오기 시작한 지도 십 년이 다 되어간다. 유족회를 비롯해 제주도 실무진,  평화재단, 기념사업회,  4·3 연구소, 다크투어 대표, 고창훈 교수팀 등 실로 많은 제주 4·3 단체들이 미군정 치하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제주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방문을 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그동안 주로 미국의 로스쿨 교수들과 학생들 주도된 연구 발표를 하는 콘퍼런스와,  미 상원과 하원 방문, 관심이 있는 의원들에게 4·3 자료집을 건네고 관심을 촉구했다. 갈 길은 멀고 미주류 사회의 관심 또한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심지어 아직도 대부분의 한인 이민 사회에서조차 4·3을 얘기하면 좌파니, 빨갱이 소리가 들리는 것이 현실이다.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 많고 고난스러운 일이지만 나름 성과도 나고 있다.

고창훈 교수팀에 의해 주도된 코네티컷 주 뉴헤븐 시에서는 제주 4·3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학살의 한 사건으로 교과서에 실렸다.  평화재단은 UN( 유엔)에서 제주 4·3 콘퍼런스를 개최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4·3평화재단에서 거의 일 년간 미국에 조사원을 파견해 국회 도서관과 미 육군 문서 보관소 등에서 4·3 당시 미군정 문서들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두어번 조사원과 식사를 하면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활동은 자료수집과 제주 4·3 영문 저널 발행 그리고 미국과 세계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임을 공유했다. 

최근 한국 국회에서 4·3특별법이 통과됐다. 남은 과제는 미국에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는 일이다. 더욱이 미국을 넘어 세계로 제주 4·3을 알리는 일이 우리 후손들의 의무가 아닐까. 

제주 4·3을 계속 알리는 일은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4·3 영령들을 현재의 시간 안에 살게끔 하는 것이다. 기념하고 기억된다는 것은 이미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당당히 삶을 살게 하는 부활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 미국에서도 제주 출신 유족들과 도민들이 모여 미주 제주 4·3기념사업회를 결성하려고 준비 중이다. 많지는 않지만, 뜻 있는 분들이 모여 미국에 4·3 영령들을 살리는 일을 하고자 한다.

한 분은 보스턴에 기반을 두고 전미주 학생들을 모집 제주 4·3 학생 청년위원회를 만들고 이들에게 제주 4·3을 알리고 있다. 더불어서 영문 4·3 저널을 발간하려는 양수연 대표의 윌든 코리아, 제주 4·3으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김유정 연구원, 뉴욕 재미 제주 도민회를 이끄는 유족이신 이한진 회장님 등도  4·3기념사업회 멤버다.

앞서 언급했듯이 4·3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남로당에 의한 폭동으로 인식하는 게 미주 한인 사회이다. 나 역시 낯뜨거운 경험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가올 미래의 제주 4·3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응원해 주길 바라며 이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양영준
제주 한경면이 고향인 양영준 한의사는 2000년 미국으로 이주, 새 삶을 꿈꾸다. 건설 노동자, 자동차 정비, 편의점 운영 등 온갖 일을 하다가 미 연방 우정사업부에 11년 몸담은 ‘어공’ 출신. 이민 16년차 돌연 침 놓는 한의사가 되다. 외가가 북촌 4.3 희생자다. 현재 미주제주4.3유족회준비위원을 맡고 있으며 민주평통워싱턴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제주투데이 칼럼 [워싱턴리포트]를 통해 미국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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