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동녘 끝 전설의 모래톱을 찾아서

설문대, 선문대, 설멩지, 설명주, 세명주, 세명뒤, 설만뒤, 설만두... 여신의 이름을 헤아려보니 끝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설문대와 세명주는 다르다느니 같다느니 옥신각신 논쟁이 숱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물음표는 자기만의 논리로 이 많은 이름들을 하나로 갈무리했다. 

“하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고 하나이며, 하늘만큼 크면서 모래알처럼 작고, 드러나 보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여신이야. 그러니 제주섬이라는 우주의 모든 곳에 제각각인 모습으로 임재해 계신 거겠지.”

누가 동의를 하든 어깃장을 놓든 물음표는 저 많은 이름과 섬 곳곳에 퍼져 있는 여신의 사연, 그것을 품고 있는 전설지들이 창조라는 태초의 위업으로 수렴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맴돌다 맴돌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첫 자리로 되돌아오는 생각은 물음표로 하여금 뒤축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전설지로 뻔질나게 이끌었다. 하여 오늘은 섬의 동녘 끝 마을 표선리로 좌표를 잡고 신발끈을 매조졌다.

당캐할망이 하루 아침에 모래밭을 만들었다는 표선해수욕장 흰모살개(사진=한진오 제공)
당캐할망이 하루 아침에 모래밭을 만들었다는 표선해수욕장 흰모살개(사진=한진오 제공)

밤 사이 표선 바다를 메우셨으니

표선리는 ‘저바당한집’이라는 본향당신을 주신(主神)으로 섬기는 바닷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어부와 해녀들을 보살피는 ‘당캐할망’이라는 여신이 있다. 저바당한집의 부인으로도 알려진  신성이다. <남제주군의 문화유적>(1996)에는 표선리 포구 곁에 자리한 해신당인 당캐할망당의 본풀이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썰물이 일면 유난히도 희고 고운 모래톱 500미터 넘게 아득히 펼쳐지는 표선해수욕장, 토명(土名)으로 흰모살개라고 불리던 이 모래밭은 먼 옛날 깊은 바다였다고 한다. 마을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밀려드는 물굽이여서 어쩌다 태풍이라도 들이닥치면 큰 해일이 일어 배가 휩쓸려가고 온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큰 수해 탓에 고생이 극심하던 이 마을사람들은 본향당신은 물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간절한 기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세명주라고 불리는 여신이 감응했다. 인적이 드문 어느 날 밤이었다. 세명주는 이 해변 동쪽 매오름 인근에 있는 ‘남초곶’이라는 숲의 모든 나무를 베어다 포구를 메웠다. 남초곶은 보리장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짙은 숲이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날이 새도록 바닷가에서 천둥벼락이 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자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문밖으로 얼씬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며 밤을 지새웠다. 우레같은 소리가 잦아들고 날이 밝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나온 마을사람들은 크게 놀라자빠지고 말았다. 집안에 있는 도끼와 괭이 따위의 연장들이 모조리 날이 휘고 이가 빠진 채 엉망이 된 것 아닌가. 퍼렇게 서 있던 도끼날이며 괭이가 무뎌지다 못해 전부 찌그러져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외양간에 매어둔 소들은 모두 등가죽이 벗겨지거나 아예 터져 있었다. 곳곳에서 놀란 사람들이 망가진 연장을 들고 몰려나와 난리도 큰 난리가 났다며 호들갑을 떨다 무심코 바다를 바라보고는 아예 질겁하고 말았다. 코앞에 있던 바다가 사라지고 기나긴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세명주할망이 밤새 마을의 도끼와 괭이를 저절로 움직이게 해 나무를 베고 바다를 메우게 한 것이다. 소의 잔등이 터진 것도 남초곶의 보리장나무를 밤새 나른 때문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여신께 크게 감사하며 당캐 포구 한쪽에 성소를 지어서 바쳤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신전으로 삼은 여신을 향해 당캐할망으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마을의 신성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뒤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이 마을에 행차한 나주목사가 당캐할망당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자 여신의 성소라는 대답에 신력이 있다면 기적을 보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때마침 짐을 가득 실은 배가 큰 파도에 떠밀려가고 있었는데 나주목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캐할망의 신력으로 배가 순식간에 포구로 되돌아왔다. 결국 나주목사는 당캐할망을 인정해 해코지를 하지 않은 채 돌아갔다고 한다.

당캐할망을 모신 표선리 당캐할망당(사진=한진오 제공)
당캐할망을 모신 표선리 당캐할망당(사진=한진오 제공)

당캐할망과 설문대

당캐할망의 사연을 두고 학계에서는 설문대와 동일한 존재라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왜냐하면 당캐할망당 본풀이가 심방의 구송이 아니라 마을 노인의 증언을 채록한 것이라서 굿과 결부된 현장의 리포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본풀이의 전승주체인 심방이 아니라는 점을 용인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증언과 교차검증을 할 수 없다는 점도 설문대의 사연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라고 한다. 이런 의견에도 불구하고 표선리 주민들은 당캐할망과 설문대를 하나의 존재로 여긴다. 육지까지 다리를 놓으려다 그만 둔 에피소드며 오백 아들을 낳아길렀다는 사연 등이 설문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백장군으로 불리는 수많은 아들들을 위해 큰 솥에 죽을 끓이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막내아들이 죽솥에 빠져 죽었다는 사연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인 설문대 자신이 죽솥에 빠져 죽었다는 사연과 사뭇 다르다. 이는 2006년에 남원읍 신흥리에서 채록한 죽솥 이야기에서 설문대의 남편이 죽은 사연처럼 여신의 죽음과는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막내아들이 죽자 설문대는 아들의 영혼을 소섬의 신으로 보낸 뒤 자신은 표선리를 찾아와서 당캐할망으로 좌정했다고 한다.

대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여러 이본(異本)이 존재하는 바, 어느 하나만을 원본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 설문대할망을 둘러싼 이야기는 더더욱 어려운 숙제들을 품고 있다. 애초에는 신앙과 결부된 신화의 영역에 속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사이 신앙에서 멀어지며 전설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표선리 당캐할망이 설문대라고 단정할 수 없다지만 송당리 본향당 본풀이에 등장하는 샛손당의 수호신으로 세명주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신화의 영역에서 숭배되던 동일한 신성으로 볼 수도 있겠다. 더욱이 표선읍을 비롯한 제주도 동남부 일대에서는 집안에 산에서 죽은 조상의 영혼을 달래거나 시신을 찾는 산신맞이굿을 할 때 설문대를 다른 신들과 함께 거명했다고 하니 신앙과 전연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사정이다. 이런 이유로 물음표는 설문대를 하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며 하나인 신성이라고 비정한 뒤, 많은 전설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한진오는 제주도굿에 빠져 탈장르 창작활동을 벌이는 작가다. 스스로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무허가 인간문화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자신의 탈장르 창작 활동에는 굿의 ‘비결정성’과 ‘주술적 사실주의’가 관통한다고 소개한다. 저서로 제주신화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한그루, 2019),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걷는사람, 2020)가 있고 공저로 ‘이용옥 심방 본풀이’(보고사, 2009) 등 다수가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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