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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유람]고기국수가 제주 향토음식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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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유람]고기국수가 제주 향토음식이 되기까지
  • 고봉수
  • 승인 2021.07.23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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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이네 국수가게(1920년대~1945년, 삼도이동). 상부 외벽의 목판재를 보면 적산가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고봉수 제공)
석산이네 국수가게(1920년대~1945년, 삼도이동). 상부 외벽의 목판재를 보면 적산가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고봉수 제공)

“제주도 사람들은 국수만 먹고 사냐? 가는 곳마다 국수 가게들이 왜 이렇게 많아?”라고 십여 년 전 대학 동창 녀석이 물어본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수 가게가 많아졌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제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향토 음식 중 하나가 ‘고기국수’일 것이다. 고기국수는 향토 음식이긴 하나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다. 

제주 향토음식 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에 의하면 

“유명세와 달리 고기국수의 유래나 역사는 알려진 바 없고 각종 포털사이트나 백과사전 등에도 온갖 억측만 난무한다. 제주에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밀국수가 없었다. 제주의 부엌살림 유물을 아무리 뒤져봐도 국수틀이나 홍두깨는 없으며 밀국수 이야기가 구전으로도 전해진 바 없다. 다만 고려 말 몽골에서 들인 메밀을 익반죽해 짤막한 국수처럼 만들어 먹었다는 메밀 칼국수만이 전해온다. 그러다 1900년대 일제강점기에 ‘건면’이 제주에 들어온다. 고기국수는 이 건면의 도입과 제주의 전통 혼례 풍습이 결합한 새로운 음식으로 100년도 채 안 된 것이다.” - 한겨레 신문 2018년 9월18일자.

제주 향토음식 중에는 돼지고기 육수에 모자반을 넣고 만든 ‘몸국’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모자반 등 해조류의 요오드 성분을 소독약 등 전쟁물자로 사용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공출되면서 몸국을 조리할 수 없게 되었다. 몸국에 넣을 모자반 대신 건면을 삶아 돼지고기 육수에 말아 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면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개인 몫으로 음식을 나눠줬는데 그것을 ‘반(槃)’이라 한다. 반에는 돼지고기와 두부, 순대가 조금씩 담겼다. 부득이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반을 돌리는 것이 제주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각 집 나름대로 ‘반’을 돌리는 범위가 있었는데 서로 대·소사를 봐주었던 이웃들이었다. 

당시에는 음식이 귀한 시절이라 반(槃)에 고기가 들어있다 하여 ‘괴기반’이라고 불렀다. 이 괴기반의 고기를 국수에 얹어 먹으면서 제주의 고기국수는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약 100년 전 제주시의 무근성(삼도이동) 일대를 거쳐 고기국수는 섬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1970년대는 과소비를 막는다고 혼·분식장려, 도축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고기국수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멸치국수가 일반화되었다. 

1990년대 초반. 지금은 국수 거리로 유명한 제주도자연사박물관 근처에 ‘파도식당’이라는 국수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국수 가게들이 근처에 생기면서 잊혔던 고기국수가 재등장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국수 거리가 조성되었다. 당시 술을 좋아하던 주당들은 항상 마지막 술자리를 파도식당 국수와 물만두로 마무리했었다. 나 또한 술자리의 막차는 파도식당이었다. 

이렇게 고기국수가 제주도의 대표적 향토음식으로 사랑받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30년 전 어느 선배가 전해 준 부모님과의 대화 내용이다.

아들 : 아버지 저 식당 준비 햄수다.
아버지 : 기이, 무슨 식당허젠?
아들 : 각재기국(전갱이와 배추를 넣어 끓인 국;편집자) 허젠 마씸.
아버지 : 야 누가 돈 주멍 각재기국 사 먹나?

이렇게 선배는 아버지에게 핀잔만 들었지만, 지금은 유명 향토음식점이 되었다. 과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던 향토음식이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현재는 별 의미 없이 보이는 자연환경이나 생활양식, 음식, 물건 중 어떤 것들이 다음 세대에 인정받을지 모를 일이다.

제주면사무소(1913~1931). (사진=고봉수 제공)
제주면사무소(1913~1931). (사진=고봉수 제공)

관덕정 서쪽에 있는 공영 주차장. 이 장소 또한 제주의 역사를 품고 있다. 고려·조선 시대 향리(鄕吏)들이 업무를 보던 주사(州司)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들어 주사(州司)는 관아에서 거둬들인 땔감이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인 사창(司倉)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향리(鄕吏)들이 관아시설로 편입되면서 주사(州司)의 역할이 축소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땔감을 저장하던 사창(司倉)은 입춘굿에 사용하는 낭쉐(나무로 만든 소)를 제작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이곳에서 모여 굿 준비를 했다. 제주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입춘굿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목사가 다스렸던 제주목(濟州牧)은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두면서 제주군(濟州郡)으로 바뀌었다. 당시 제주군 중면(中面)이 오늘날 제주시 지역이다. 1913년 중면은 제주면으로 개칭되었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주사 건물에 유리문을 달고 제주읍으로 승격되던 1931년까지 18년 동안 제주면사무소로 이용됐다. 일제는 1931년 기와집이던 제주면사무소를 허물고 서양식 청사를 신축해 제주읍사무소를 설치했다.

제주읍사무소. (사진=고봉수 제공)
제주읍사무소. (사진=고봉수 제공)

제주읍은 1955년 9월 1일 시로 승격했다. 이에 국내서 활동하던 건축가 박진후에게 설계를 의뢰해 제주시청사가 1959년 10월 10일에 완공되었다. 옛 제주시 청사는 제주 최초의 시멘트 벽돌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였다. 옛 제주시 청사는 중앙에 현관 포치를 두고 좌우 대칭 형식을 갖춘 형태로, 1980년대까지 국내 관공서 건물의 일반적인 외관 형태였다. 옛 제주시청사는 1980년 광양의 현 제주시청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20여 년간 제주시 행정기관으로의 역할을 하였다.

옛 제주시청사. (사진=고봉수 제공)
옛 제주시청사. (사진=고봉수 제공)

제주시청 이전으로 이 건물은 민간에게 매각된 뒤 오랜 기간 상업공간으로 사용되다가 건물의 누수 등 관리의 어려움으로 2012년 12월 말에 철거되었다. 나는 철거되던 그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2012년 12월 23일 출근하고 창밖을 보니 옛 제주시청 건물 앞에 굴착기가 철거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2012년에는 중문에 있는 ‘리카르도 레고레타’(멕시코)의 작품인 ‘카사 델 아구아’(물의 집) 철거 반대에 대한 여론이 있을 때였다. 2012년 12월 28일 카사델아구아 살리기 문화연대의 3번째 공연이 벤처 마루 앞에서 열리고 있을 때, 옛 제주시청은 완전히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철거되는 옛 제주시청사. (사진=고봉수 제공)
철거되는 옛 제주시청사. (사진=고봉수 제공)

옛 제주시청 건물의 건축주가 철거를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하고 있을 때 제주시에서 건물 매입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랬다면 ‘카사 델 아구아’의 보존보다 옛 제주시청의 보존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1995년 5월에도 많은 분이 철거에 반대하며 보존하자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김중업 선생의 작품인 ‘제주대학교 본관’(용담동) 건물이 안전상의 문제로 철거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왜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옛 제주대학교 본관. (사진=고봉수 제공)
옛 제주대학교 본관. (사진=고봉수 제공)

옛 제주시청 건물이 철거된 후 제주시는 2013년 26억5000만원을 투입해 옛 제주시청 대지를 매입했다. “원도심 주차난 완화와 상권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라면서 사업비 2억 원을 투입해 2015년 공영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공영 주차장은 2025년까지는 주차장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2026년 이후에 다른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다 하니 시청 민원실이나 삼도이동 주민센터의 이전으로 관청으로서의 역사적 공간을 이어 나가면 어떨까? 주차장 하나 짓자고 근대건축물을 철거하고 대지를 매입한 것은 아니었기를….

철거 후 들어선 주차장. (사진=고봉수 제공)
철거 후 들어선 주차장. (사진=고봉수 제공)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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