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고진숙)
성주청터 탐라국 왕궁인 성주청은 관덕정앞 제주 우체국자리에 있었다. 바로 옆이 칠성통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사진=고진숙)

1105년 탐라국은 오랜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고려에 편입되었지만 성주와 왕자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이 '이왕가*'라는 일종의 귀족으로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고려정부에서도 귀족대접을 받았다.

귀족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이 건국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성주는 왼쪽(제주 동부)을 다스리는 좌도지관, 왕자는 오른쪽(제주 서부)을 다스리는 우도지관이란 토관직**을 받는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없어지고 제주는 세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며 이를 총괄하는 제주목사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이로서 탐라국의 모든 기득권이 사라지게 된다.

탐라국의 성주는 1402년에 태종에게 마지막 성주 고봉례가 성주작위를 반납할 때까지 고씨가문이 세습했다. 그런데 마지막 왕자는 문충세로 양씨도 부씨도 아닌 문씨가문이었다. 영역 다툼 없이 평화롭고 순조롭던 탐라건국신화 속 세부족은 어디로 가고 갑자기 문씨가문이 튀어나온 것일까?

탐라건국신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땅속에서 솟아난 세명의 신인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바다 건너온 벽랑국 공주 셋과 결혼한 뒤 활쏘기 시합을 해서 자기구역을 정해 평화롭게 나라를 이루고 살아간다.”

고을나 부족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별자리를 보고 계절과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천문학적 능력이었다. 덕분에 제사장인 성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신성한 지위에는 다른 혈통은 들어올 수 없었다.

탐라국의 왕자는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라면 왕이라고 해야 옳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정복전쟁시대가 시작되면 왕권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부족에 의해 독점되고 제사장 가문은 뒤로 밀린다. 신라의 김씨, 고구려의 고씨, 백제의 부여씨가 그랬다. 그러나 탐라국에서만은 왕자는 왕이 되지 못한 채 영원한 왕자로 남아야했다. 초강력 대형태풍이라도 한번 지나가면 탐라인들은 신의 힘을 본다. 어찌 감히 신의 대리인인 성주에게 대항한단 말인가.

처음엔 단군왕검처럼 고씨가문에서 제사장인 성주와 군사적 수장인 왕자를 독차지했다. 뒤이어 왕자의 자리를 차지한 가문은 외지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갖춘 양씨가문이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제사장가문은 군사력을 갖춘 가문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야 한다. 탐라에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성주가문은 외부세력 즉 거대한 맏형님 고려를 뒷배로 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동안 탐라를 손에 넣으려는 외세는 없었다. 순풍에 돛을 달고라도 꼬박 닷새를 항해해서 와야 하는 탐라는 매력이 없는 섬나라였다. 그러나 고려는 달랐다. 그들은 바다의 가치를 알았고 배 만드는 기술도 발전했다. 성주가문은 독립성을 포기하는 대신 가문을 유지했고, 고려는 싸우지 않고 손쉽게 탐라를 손에 넣었다. 고유가 과거시험에서 당당히 수석합격하고, 그 아들인 고조기는 고려의 재상에 오르면서 성주가문은 고려정부에서 기득권을 얻었고, 탐라국 성주의 자리도 굳건했다.

그러는 동안 고려정부에서 온 관리는 합리적인 세금을 거둬간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탐라국을 마치 정복지 주민 다루듯 했다. 처음 탐라에는 정규직 관리인 현령이나 판관이 아니라 순환 별정직 관리인 구당사가 파견되었다. 김부식이 자신 문하에 있는 오인정에게 구당사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너는 가난하니 제주도에 가서 한몫 챙겨 나오라’고 말을 할 정도로 탐라는 가렴주구 땅이었다. 가난한 관리라도 제주에 오면 부유해져서 나가는 전통이 이때부터 생겨서 조선말까지 이어진다.

1168년 양수의 난으로 시작된 제주 민란의 전통은 1901년 대한제국시기 신축항쟁(이재수의 난)까지 이어진다 (영화 '이재수의난' 포스터)
1168년 양수의 난으로 시작된 제주 민란의 전통은 1901년 대한제국시기 신축항쟁(이재수의 난)까지 이어진다 (영화 '이재수의난' 포스터)

그렇지 않아도 땅이 척박한 탐라 백성들은 견디지 못했다. 삼신인의 후손은 탐라백성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고려정부의 편에 선 성주가문은 이 의무를 잊었다. 그래서 양씨가문이 탐라국 백성들의 뜻을 따라 민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양수의 난'이다.

고려조정은 장두 2명과 주모자 5명을 처형하는 대가로 오히려 민란에 참가한 사람들에겐 포상을 내려 집으로 돌려보낸다. 이것은 이후 제주 민란의 전형이 된다. 반란이 일어나면 제주 사람 전부 참가하고, 주모자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고, 그들 죽음의 대가로 백성들은 외세의 수탈에서 벗어난 것이다.

(제주 4.3을 일으켰을 때도 이런 민란의 전통을 따랐으나 그 결과는 참혹한 비극이었다.)

탐라성주는 민심을 등에 업고 자꾸만 커져가는 왕자의 힘이 달갑지 않았다.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 탐라의 지배자도 하나여야 했다. 그래서 제주에 정착한 외지 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것이 문씨가문이다. 문씨가문은 하늘에서 내려온 건국신화 속 가문이 아니기에 감히 왕위를 넘보지 못할테니 말이다.

문씨가문의 제주 입도는 고려 명종 때인 1197년이라고 한다. 입도조는 문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대제학에 올랐다가 탐라에 파견되어 학문을 가르치고 중앙문물을 전파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제주에 뿌리를 내린 후 문씨가문은 (아마도 성주가문과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당시 승승장구하던 양씨가문과 대립하는데 1167년 문행노의 난이 그것으로 이 난을 제압한 것은 왕자 양호이다.

양씨가문은 양수의 난에서 보듯 외세에 맞서 민란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고 친고려적인 성주가문에 맞서 탐라독립을 꿈꾸었다. 왕자 양호는 원나라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스스로를 백제인이라고 할 정도로 탈고려적인 인물이다. 탐라가 잠시 원의 직할령인 탐라총관부가 되며 고려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왕자 양호는 성주에 비견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이에 대항해 성주가문은 문씨가문의 문창우를 사위로 삼는 결혼동맹을 맺는다. 두 가문의 노력으로 1294년에 탐라는 다시 고려에 되돌려져 제주목이 되고 양씨가문은 힘을 잃었다. 이후 왕자가문은 문씨가문에서 세습했다.

1318년 충숙왕시절 사용과 금성의 난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제주 토착민들의 탐라독립항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전과 다르게 민란은 성주와 왕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문창우의 아들인 문공제가 고려 정부군과 함께 이 난을 제압한다. 이후 성주와 왕자가문의 자리는 굳건했다.

양씨가문은 제주 사람들을 위해 중앙정부에 맞서는 ‘양이목사 설화’를 통해 보듯 오랫동안 토착민중들과 유대감을 가졌던 듯하다. 그것 또한 제주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일제 때 항일항쟁의 주역들은 대부분 토호랄 수 있는 집안 출신이거나 지역 유지였다.

이렇게 숨막히는 왕자쟁탈전은 자청비 설화로 표현되어 있다. 농경의 여신인 자청비 설화는 간단하게 요약하면 자청비가 자신을 넘보는 하인 정수남을 죽이고 학문을 익힌 문도령과 결합하는 내용이다. 해석하면 정수남은 자청비와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 즉 제주 토착부족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문도령은 외지인 즉 고려관리이며 지식인이다.

자신의 역사책을 갖지 못한 탐라의 역사는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설화의 형태로 구전된다. 자청비설화속에서 우린 마지막 왕자님이 탄생하게 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화속 귀여운 문도령은 사실은 왕자님이었던 것이다.

 

* 이왕가 :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의 일개 가문으로 격하하여 부르는 명칭

** 토관직 :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평안도·함경도·제주도 등지의 토착인에게 주었던 특수 관직

*** 탐라국을 만든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도 한반도 정복전쟁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각각 고구려계, 부여계, 양맥계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을나가 북방민족들 사이에서 추장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 양씨가문이 토호가문이면서 또한 외세에 맞선 양면성을 가진 것은 양이목사설화에서도 보여진다. 설화의 내용은 양이라는 제주 목사가 진상품인 말을 빼돌려 사욕을 채우려다 오히려 제주 사람들 편에서 중앙정부와 싸우고 진상을 줄여주는 이야기이다.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매월 첫째주 수요일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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