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 작가
한진오 작가

#내력(來歷)은 내력(內力)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내력(來歷)을 ‘지금까지 지내온 경로나 경력’,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까닭’,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유전적인 특성’으로 정의한다. 통상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지금까지 거쳐온 혹은, 현재에 이르게 된 그 속에 든 이야기를 말한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이라는 제목의 시에 이렇게 썼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대추야/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시인의 눈에 대추의 붉음은 몇 개의 태풍과 몇 개의 천둥과 몇 개의 벼락과 번개와 무서리 내리는 밤과 땡볕과 초승달 몇 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추의 내부에 들어온 것이 드러나는 것. 이는 세상과 ‘통’하는 과정이다. 대추가 붉어지기 위해 필요한 ‘내력(來歷)’이다. 그 내력은 세상과 통하면서 쓰인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내력(來歷)은 ‘내력(內力)’이다. 대추 안에 담긴 태풍이며 천둥, 초승달 등은 대추 한 알을 붉어지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것들은 대추에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대추의 전설이 된다. 이야기의 씨앗. 그 속에도 몇 개의 태풍이 들어있으리라.

이호1동 백개본향 붉은왕돌할망당(사진=박소희 기자)
다끄네본향궁당(사진=박소희 기자)

#내력의 얽힘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야기에 이야기에 또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몇 개의 태풍이 다시 몰아쳐 오고, 몇 개의 천둥이 울려도 마지막 마침표를 찍지 않은 채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어디 대추의 내력뿐이랴, 제주의 내력과 제주 사람의 내력도 그렇게 쓰여 왔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신의 내력에 덧붙였다.

살아 있는 신화는 계속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입에서 입으로 전래되는 이야기는 살이 찌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어느날 더이상 신화의 변모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화 속 신이 박제된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때 신화는 단 한 줄도 빼고 더할 것이 없다는 경전이 되고 만다.

도두봉 오름허릿당. 사진 가운데 붉은 한복을 걸어둔 것은 제주 전래 당굿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이다.(사진=김재훈 기자)

입에서 입으로 전래된 이야기가 어디까지 명확해질 수 있을까. 혹은, 얼마나 명확하게 규명되는 게 옳을까. 제주신화와 당의 내력은 얽혀있는 집채 만한 명주 실뭉치다. 설문대할망을 위해 마련했지만 한 통이 모자라 옷으로 짜지 한 채 엉켜있는 아흔아홉 통의 명주실 뭉치와 같다. 

이 실뭉치 같은 제주신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시도가 이어진다. 이야기가 마땅한 필연 속에서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면서. 하지만 이내 깨닫게 된다. 한쪽 실의 끝을 잡아당기면 엉킨 실뭉치가 풀릴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실뭉치는 더욱 엉키고 만다.

제주신화는 족보처럼 내력을 연대별로 정리하며 써내려간 역사서가 아니다. 제주신화는 이 굿에서 저 굿으로,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이 심방(무당)에게서 저 심방에게로,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제주 사람들이 품고 있는 내력(來歷)의 얽힘이다. 제주신화는 여전히 우연의 들숨과 필연의 날숨으로 호흡하며 그 내력을 써 나가고 있다. 간신히 이어지는 제주 전래 굿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위기는 위기다. 굿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화의 고장이라고 말은 하지만 굿 좀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려 해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 유교에 입각한 관리들의 탄압과 일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거치는 동안 민속신앙은 ‘미신’으로 치부되며 철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적인 것, 제주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제주 전래 굿이 하와이의 훌라춤 같은 단순 구경꺼리가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위정자들이 '제2의 하와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제주도. 제주 섬의 ‘내력(來歷)과 ‘내력(內力)’은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세상을 어떻게 통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이가 있다. 한진오 작가다. 한 작가의 말을 듣기 위해 지난 8일 제주시에 ‘숨어 있는’ 신당을 찾아 나섰다.

#격리된 신당

도두2동 몰래물 본향 홀케 고렝이물당은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로 인해 사라진 마을 ‘몰래물’의 본향당을 역할을 하던 당이다. 용담해안도로에 인접한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 굿의 내력이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현 상황이 이 당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도두2동 홀케 고렝이물당(사진=김재훈 기자)

이 당에 제주 전래 굿을 하기 위해 찾는 발길은 끊겼다. 하지만 보살(제주 전래 굿을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민속신앙을 따르는 이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혹은 다른 이들이 민속신앙의 힘을 빌려 마음과 몸을 치유하기 위해 굿을 하거나 기도를 올린 흔적이 있다. ‘비념(기도)’하는 이들은 이 당에서 당이 가진 내력(內力) 즉, 영험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인해 제주 전래 굿이 아닐지라도 민속신앙이 이어져 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 당의 내력(來歷)을 이렇게 써나가고 있다.

하지만 제주 행정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제물을 바다에 ‘불법투기’하는 경우가 있다며 사람들이 고렝이물당을 찾아 행하는 무속행위(굿) 일체를 금지한 것이다. 해변에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관은 일단 제를 지내기 위해 올리는 유기물(음식) 만큼은 보기 흉했던 모양이다. 산 중의 묘에 유교식 제를 올릴 때 산짐승 밥으로 남겨두고 내려오는 제물에 대해서 관이 그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하지만 행정은 민속신앙에 따른 제물을 올리는 바다 옆 당 주변에는 철제 펜스를 쳤다. 출입 자체를 원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도두2동 홀케 고렝이물당 인근에 서 있는 인어 동상(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작가는 답사를 다녀온 뒤 자신의 SNS에 이렇게 한탄했다. “놀라운 점은 팬스에 갇힌 고렝이물당 코앞 도로변의 풍경이다. 돌고래와 함께 파도를 타고 날아오르는 인어(동상)가 아리따운 자태를 자랑하는 조형물이 서 있다. 남의 나라 전설의 존재는 황금빛 치장까지 해놨는데 우리의 신성은 인어의 미소 뒤 녹슨 철망에 갇힌 격리의 존재가 됐다.”

#내력 쓰기

제주 서부 지역에는 ‘송씨할망’을 모시는 신당이 많다.(‘할망’이라고 해서 꼭 노년의 여성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부인’처럼 여성에 대한 존칭어로 보는 시각이 있다.) 제주의 삼성 신화 속 고씨, 양씨, 부씨가 아니라 왜 송씨일까. 이번에 답사한 당들의 경우 도두봉 오름허릿당, 이호동 현사마을 본향 남당처럼 당의 내력이 다른 당으로 뻗어가는 ‘가지치기’ 방식으로 번지며 송씨할망을 모시게 된 당이 여럿이었다.

제주 서부지역에 ‘송씨할망’을 모시는 신이 많은 이유에 대해 한진오 작가는 최근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전제로, 뭍에서 전해진 부군당 신화가 변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부군당 신화에는 ‘손각시(송각시)’라는 신의 이름이 나온다. 구전된 신화이기에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원한이 많고 미혼인 ‘처녀귀신’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바다를 건너 제주도로 건너오고, 제주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옷을 갈아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신화가 세상과 통하며 그 내력을 써온 것이다.

오라동 내왓당,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오라동 내왓당, 한진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내도동 두리빌레당과 오라동 방에왓당

알작지(자갈해변)로 인적이 드물어 파도에 자갈이 구르는 소리를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알작지에 위치하고 있는 당이다. 하나의 널찍한 바위 자체가 신을 모시는 당이 되었다. 이 당의 내력에는 조선시대 후기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제주 신당을 철폐했던 조선시대 관리 이형상 목사와 관련한 이야기다. 이형상 목사를 무사히 고향으로 보내준 뒤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 박동지와 김동지를 큰 뱀이 구해줬다. 그들은 내도동에 도착했고 그 뱀을 모셔 부자가 되었다. 이후 내도동 주민들은 그 뱀을 내도동 당신으로 모시게 된다. 박동지와 김동지는 제주신앙을 철폐하기 위해 경주한 관리를 도운 이들이다. 그런데 신은 그들을 무사히 살아 돌아오도록 도왔다. 뱀신은 이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다만 내도동에 정좌했을 뿐이다. 상처 입은 제주신화가 복수의 내력이 아닌 공존의 내력을 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진오 작가에 따르면 제주종합경기장 건설로 오라동 방에왓당(웃당, 하르방당)이 파괴되었다. 방에왓당이 파괴되자 이 당에 좌정하던 하르방을 내왓당(할망당)에 함께 모셨다. 그런데 웃당이 사라질 때 웃당에 있던 큰 뱀도 사라졌다. 그 이후

 체육행사 때 악천후가 잦고 비가 오는 일이 늘었다. 부정탔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도민체전이 열릴 때면 꼭 비가 온다’는 의미로 ‘도체비’라는 말을 만들어 붙였다. 기존 신화에 새로운 이야기가 붙는 그런 장면이다.

#공존의 내력

내도동 알작지 해안도로 재공사를 하면서 버팀목을 두리빌레당에 고정하고 있다.
내도동 알작지 해안도로 재공사 작업자들은 사진 오른쪽 위와 같이 버팀목을 두리빌레당에 고정했다.

이번 답사의 길잡이 한진오 작가는 쇠퇴하는 신당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대로 된 안내판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용담해안도로 변의 고렝이물당은 신당이 처한 상황을 여실하게 보여줬다. 바닷가의 널찍한 바위 하나 그 자체로 신당으로 쓰였던 내도동 알작지의 알당(두리빌레당)이 처한 처지도 그러했다. 해안도로개발에 밀려 신을 인근 제단으로 옮겼다. 가속화되는 난개발 속에서 신당은 계속 밀려나고 있다.

이번에 답사한 대부분의 당에는 제를 지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진오 작가는 대부분 뭍에서 온 무당이나 민속신앙인들이 다녀간 흔적이라고 말했다. 나무에 걸어두는 천이 제주 전래 굿의 전통과 다르거나, 제물을 사용하는 법 등이 다른 것이다. 제주 전래 굿은 돼지를 터부시하여 제물로 사용하지 않는데,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진오 작가에 따르면 이호1동 백개본향 붉은왕돌할망당의 경우, 당의 내력을 이어가기 위해 보살에게 당을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제주의 신당은 밀리고 밀려나면서 한편으로는 그 내력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더하고 있다. 한진오 작가는 제주신화와 당 신앙이 관광자원·문화자원으로 소비되기보다 사람들이 비념을 하기 위해 찾는, 생활 속 치유의 공간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무덥고 종종 소나기까지는 내리는 가운데 이번 답사에 함께한 참가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번 답사자들의 걸음걸음이 신당의 내력(來歷)을 회복시키고 공존케 하는 내력(內力)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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