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윷’은 법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노는 윷을 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여럿이 있을 때 있는 둥 없는 둥 쓸모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보리범벅’은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며, ‘보리떡에 쌍장구’는 하는 짓이 격에 어울리지 않음을 비유하는 속담이다. 이처럼 보리에는 모자라다는 의미와 업신여기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
보리는 1980년대까지 쌀과 함께 우리 민족의 주식이었고, 엿기름, 된장, 누룩, 보리차 등의 원료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보릿고개를 넘어가게 했던 구휼곡(救恤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가 천대를 받았던 이유는 쌀과의 비교 때문일 것이다.
보리밥은 쌀밥에 비해 식미가 떨어지고, 윤기와 찰기가 없어 깔깔하다. 먹고 나면 배도 빨리 꺼지고 방귀마저 고약하다. 보리밥을 지으려면 보리를 미리 삶는 수고 또한 해야 했다. 쪄내서 말린 제품인 ‘납작보리’가 생겨난 것은 이 때문이다.
보리는 겨울에 자라고, 벼는 여름에 자란다. 그래서 그럴까? 음인 보리는 익어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양인 벼는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보리가 음의 성질을 띠어서 양이 음을 천대한 조선시대에 천대를 받은 것은 아니겠지만 보리는 ‘가난한 사람이 먹는 쌀’로 이미지가 굳어졌고, 서민들까지도 위와 같이 괄시하고 천대하였다.
그러다 보니 보리는 남아돌아도 쌀은 늘 부족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문제를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로 받은 밀가루와 국내 생산이 많은 보리의 소비 진작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혼분식 장려 운동’이다. 이 운동은 식생활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전개되었지만 실질은 쌀은 덜 먹게 하고 밀가루와 보리는 더 먹게 하는 강제 분배 조치였다.
박 정권은 음식점에서 제공하는 밥은 보리를 25% 이상 섞도록 하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이라 하여 점심은 국수와 수제비 등 분식만을 팔도록 하였다. 또 설렁탕, 추어탕 등의 일부 음식에는 밀가루 국수를 내어놓도록 강제하였다. 지금도 일부 식당에서 설렁탕 등에 국수가 딸려 나오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유산이다.
박 정권은 쌀로 술을 만드는 것도 일절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쌀을 증류해서 만드는 전통 소주는 사라지고, 주정에 물을 희석하고 아스파탐 등으로 맛을 낸 희석식 소주가 소주를 대표하게 되었다. 또한 막걸리의 원료가 쌀에서 밀가루로 바뀜에 따라 막걸리 맛이 떨어지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1970년 주류시장의 5%에 불과했던 맥주가 막걸리를 대체해갔다.
88올림픽 이후 맥주는 부동의 1위로 자리를 잡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때 집집마다 술을 빚어 제사에 올리고 손님에게 접대했던 우리 민족 특유의 가양주 전통이 완전히 끊겼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하였다. 밥에 보리나 잡곡이 30% 이상 들어 있지 않으면 체벌을 하거나 감점을 주었다. 노란 계란 완숙으로 하얀 쌀밥을 덮은 친구의 도시락에 혹해 꽁보리밥 도시락과 바꾸어주었다가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혼분식 장려 운동의 결과 쌀밥과 채소 위주의 6백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식단은 쌀밥뿐만 아니라 빵, 면 등의 분식을 먹는 식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육류소비량이 계속 늘면서 1970년 136.4kg이었던 1인당 쌀 소비량은 2020년 57.7kg으로 줄었다.
맞벌이 및 1인 가구는 식사에 있어서 편리함, 시간 절약이 우선이다. 그래서 가정간편식, 즉석식품 등 가공품 위주의 식사와 외식을 선호한다. 또한 먹방의 영향으로 맛, 재미, 쾌락의 관점에서 먹거리를 선택한다. 그러다보니 비만, 당뇨 등과 같은 생활습관 질병 발병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보리는 전분작물이면서도 단백질이 8∼15% 들어있다. 비타민 B1, B2, 나이아신, 칼슘, 철분 등이 쌀에 비해 많이 들어있어 각기병, 빈혈 등을 예방한다. 식이섬유도 많아 변비에도 좋다. 배아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토코트리에놀(Tocotriennol)은 혈중 콜레스테롤 함량을 낮추고, 보리에 특유한 베타글루칸(beta Glucan)은 당뇨를 예방한다.
우리나라는 약 500만이 당뇨병 환자다. 그중 2형 당뇨병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2010년 하버드대학 공중보건연구소는 ‘백미를 일주일에 5번 이상 먹는 사람들이 백미를 현미로 바꾸면 2형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16%, 보리로 바꾸면 36% 낮아진다고 발표하였다. 또 보리의 GI(Glycemic Index, 당지수)는 50으로 현미(56)보다도 낮다. 이제 당뇨 환자에게 보리밥을 권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처럼 보리는 식량작물에서 건강기능식품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6백여 년 동안 천대받던 보리가 화려한 백조가 되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것도 이렇게 뒤집어진다.
후박나무 아래에 놓인 평상에 퍼질러 앉아 멜젓 얹은 꽁보리밥을 콩잎에 싼다. 된장을 얼음에 푼 노각냉국을 그릇째 들이킨다. 더위는 된장 국물과 함께 쑥 내려가고, 뻑뻑했던 몸은 꼭꼭 씹어서 풀리는 꽁보리밥처럼 술술 풀어진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격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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