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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유람]무근성,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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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유람]무근성,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 고봉수
  • 승인 2021.08.27 17: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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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가 들려주는 제주 원도심 이야기⑧

제주목 관아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사나 중앙관리가 머물던 ‘객삿골’, 서쪽에는 제주진영의 뒤에 있다고 해서 ‘영뒷골’, 사창 터 뒤에 있다고 해서 ‘창뒷골’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영뒷골과 창뒷골을 끼고 있는 성굽길을 기준으로 북·서쪽은 고성(古城)이 있었던 ‘무근성’, 그 북쪽은 ‘탑바래’(탑알, 탑아래, 탑동)라 하였다. 

삼도2동 무근성 마을회 제작. (사진=고봉수 제공)
삼도2동 무근성 마을회 제작. (사진=고봉수)

성굽길은 지금의 김판규 외과 건물이 위치한 무근성 7길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벽(城壁)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성벽을 헐어버리고 길을 만들면서 성굽길이라 불렀다. 성굽길 일대는 탐라 시대에는 고성(古城)이, 조선 시대에는 제주목 관아가, 일제 강점기부터는 관공서들이 모여 있었으니 제주도 최초의 저잣거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성굽길. (사진=고봉수)
성굽길. (사진=고봉수)

성굽길에는 오래전부터 유흥업소가 밀집되어 있었고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성굽길은 교육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학교 환경위생정화구역에 해당하여 유흥주점이 있을 수 없는 장소이다. 학교 환경위생정화구역으로 지정 전에 영업하던 곳이라 법률을 소급 적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도시재생센터에서도 업종 변경을 위한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현재 두 개 점포만이 업종을 변경하여 영업하고 있을 뿐이다. 
 
북초등학교 아이들이 등하굣길에 지나다니는 도로여서 학부모들은 걱정이 많다. 아이들을 위한 법령 개정을 통해서 영업 유예기간을 두고 현행법이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혹시 제주 최초의 ‘저잣거리 터’라고 지켜야 한다고 할 분이 계실까? 

무근성 지도(삼도이동 무근성마을회 제작). (사진=고봉수)
무근성 지도(삼도이동 무근성마을회 제작). (사진=고봉수)

무근성은 탐라 시대에 고성이 있었다고 해서 묵은성(陳城)이라 했다. 조선 시대에 제주 성을 지을 때 새 성안과 대비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행정구역상 제주읍 삼도리 진성동(陳城洞)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많은 친구가 무근성에 살고 있어서 자주 놀러 왔었다. 성굽길에서 인자약국 방향으로 진입하면 강한 바닷바람을 마주하게 된다. 그제야 ‘아. 이제 무근성에 들어왔다’라고 알아차릴 만큼 바람이 매서웠다. 

당시에는 매립 전 탑바래까지 포함해서 무근성으로 알고 있었다. 아내가 살았던 곳도 엄밀히 따지면 무근성이 아니라 탑바래가 맞는데 아내는 인정하지 않는다. 무근성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초등학교 동창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근성에는 자기 집이 아닌 임대로 살았던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 당시 제주 최고의 명문인 제주북초등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은 50년 전이라고 지금보다 절대 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강남 8학군을 찾아다니는 지금의 부모님들이나 우리 부모 세대들이나….

당시만 해도 무근성 안에는 태평탕, 약수탕 등 2개의 대중목욕탕이 있을 정도였으니 마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태평탕은 젊은 친구들이 리모델링하여 카페로 영업 중이다.

동네슈퍼와 문화세탁소(왼쪽), 창성이용원(오른쪽). (사진=고봉수)
동네슈퍼와 문화세탁소(왼쪽), 창성이용원(오른쪽). (사진=고봉수)

무근성으로 진입하면 정겨운 점포들이 몇 군데 보인다. 인자약국이 있었던 자리에는 문화세탁소가 오래전에 들어와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 간판의 전화번호가 ‘58-5309’이다. 점포가 오래되었다는 증거다. 세탁소 좌측의 동네슈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작은 가게지만 수산물도 팔고 있는 것을 보면 동네 사람들의 먹거리를 공급해 주는 작은 시장 같다. 동네 슈퍼 옆 골목에는 친구들이 살았던 집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 촘촘히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 방향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무근성에 살던 친구들이 애용하던 창성이용원이 보인다. 이용원들이 미장원에 밀려 많이 쇠퇴했지만 창성이용원의 사인볼은 지금도 힘차게 돌고 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이용원 의자의 양 팔걸이에 나무 널판을 걸쳐 놓으면 그 위에 앉아서 머리를 잘랐다. 

여기를 지나칠 때면 당시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된다. 지금은 이용원 유리창에 걸린 서울가발박사 광고문이 눈에 들어온다. 특허 가발이라고 하는데 점점 탈모가 심해지는 내 머리를 가발박사에 맡겨봐야 하는 건가?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이 점포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으니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 어릴 적 추억을 간직한 오래된 점포들이 영업도 잘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점포 주인들이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운영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무근성 백악관이라 불리던 고급 주택. (사진=고봉수)
무근성 백악관이라 불리던 고급 주택. (사진=고봉수)

창성이용원 맞은편에 고급 주택이 보인다. 1980년에 준공한 주택이다. 당시에 보기 드물게 주택 외벽을 하얀색으로 마감하여 ‘무근성 백악관’이라고 불리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하얀색의 외벽 색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물주도 현재까지 거주하고 계신다.

조관집 터. (사진=고봉수)
조관집 터. (사진=고봉수)

창성이용원 서쪽은 조선 시대 중앙 조정의 관리 ‘조관(朝官)’들이 살던 집터이다. 무근성 양반들이 거의 이곳에 모여 살았다, 그래서 양반 동네라고도 했었는데 이것도 마을의 자부심을 품게 했던 이유일까?

강만호 집터. (사진=고봉수)
강 만호 집터. (사진=고봉수)

무근성에는 고씨, 문씨, 강씨 등 세 부호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고씨와 강씨 집안에서는 ‘만호’(조선 시대 수군 관직으로 종4품, 현재 연대장급) 관직을 맡은 분이 있어서 고 만호, 강 만호 이렇게 지칭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들이 살던 집터는 원형을 잃었다. 그 중 강씨 집안의 자손은 2005년까지 살다가 이사를 하였으니 가장 오랫동안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속 주택은 지금도 강씨 집안이 보유하고 있다.
       
무근성에 오래 사신 문종국님의 어느 인터뷰 내용을 보면 “문씨는 사람이 나왔고, 고씨는 재산이 좋고, 강씨는 수가 적고 대외적이지 못했다”라고 한다. 하지만 고씨, 강씨 집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고서는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을 것 같다.

통물. 피난민촌이 있었던 곳(강 만호의 안밭). (사진=고봉수)
통물. 피난민촌이 있었던 곳(강 만호의 안밭). (사진=고봉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제주에는 2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몰려왔다. 피난민들을 수용할 마땅한 공간이 없을 때 당시 피난민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강 만호의 후손은 자기 소유의 밭을 내놓아 피난민들이 기거할 수 있는 막사를 짓게 하였다. 지금도 피난민촌 터는 그 후손이 보유하고 있다.

고 만호 집터. (사진=고봉수)
고 만호 집터. (사진=고봉수)

무근성 갑부의 집터인 고 만호 집안은 6대를 고관 벼슬을 하며 내려온 집으로 집안에 ‘말방애’가 있었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고 만호의 후손들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진의 좌측(남쪽)은 ‘무근성’, 우측(북쪽)은 ‘탑바래’이다. 구린질이 무근성과 탑바래를 나누는 길이다. 그 길은 ‘병문내’를 거쳐 용담동 ‘부러리 동산’으로 올라가 ‘정드르’(현 제주공항)까지 연결되었다.

구린질은 백성들에게 조관(朝官)이 사는 곳을 지나다니지 말고 돌아서 다니라고 조관들이 자기 밭을 내놓아 만든 길이다. 자기들의 땅을 내놓으면서까지 왜 돌아서 다니라고 했을까? 조선 시대 신분제도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고급 아파트에 택배기사들의 진입을 막는다는 언론 기사를 접하면서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구린질. (사진=고봉수)
구린질. (사진=고봉수)

세월이 흘러 지금은 구린질에 젊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높은 작은 맛집들이 들어서면서 더 활성화되어가고 있다.
 
당시 부모님의 교육열로 무근성으로 이사 왔던 친구들은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서 무근성을 많이 떠났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1970년대 서사라 주택단지 조성과 신제주 개발 등으로 떠난 친구들도 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우리 부모 세대들이 현재까지 무근성에 살고 계시고, 무근성에 연고가 있는 우리 세대들도 거주하지는 않지만 매각하지 않고 고향 집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급속한 개발의 변화 속에 무근성은 그나마 조금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도의 예산을 지원받아 무근성 지역의 건축물 전수조사를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제주도가 전수조사의 자료를 바탕으로 보존해야 할 건물을 매입하거나 올레의 원형을 보존하는 등 마스터플랜을 가졌으면 한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무근성의 공간적 역할을 기대해 본다.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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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 2021-08-28 17:21:59
좋은 정보,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