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응선 묘 (사진= 제주흥사단)
백응선 묘 (사진= 제주흥사단)

제주흥사단은 29일 독립운동가 김시숙·백응선 지사의 묘를 벌초했다고 30일 밝혔다.

흥사단이 백응선 지사 묘를 벌초를 하게 된 경위는 2009년 3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항일기념관 직원 이성보씨의 안내로 백응선 지사의 묘를 답사할 당시 후손이 제주에 살고 있지 않아 벌초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주에 살고 있는 손녀(養孫女) 백경랑씨에게 연락해 벌초를 대신 해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그 해 5월 봄 벌초를 하고 8월말에 다시 벌초를 했다. 이후 12년 째 매년 8월말〜9월초 마다 벌초를 해왔다. 벌초한 후에는 간단한 제물을 차려 참배를 하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백민자 단우가 제물을 차려왔다.

29일 김지숙 지사 묘를 벌초하는 제주흥사단(=제주흥사단)
29일 김지숙 지사 묘를 벌초하는 제주흥사단(=제주흥사단)

김시숙 지사의 묘는 올해부터 벌초를 시작했다. 제주흥사단 고영철 단우가 작년 11월 17일 제주KBS에 출연해 김시숙 지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김시숙 지사의 묘를 벌초하고 있던 김세건 씨가 고영철 단우에게 연락을 했다. 김 씨는 '네가 그 묘는 벌초를 하라'는 일본에 계신 형님 부탁에 몇촌간인지도 모르는 김시숙 지사의 묘를 지금까지 벌초해 왔다. 하지만 현재 연로한 상황인데다 자식한테 물려줄 형편도 안 돼 지난 4월 흥사단이 김시숙 지사의 벌초를 맡기로 했다. 

한편 ㈔흥사단은 1913년 민족의 선각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주창에 의해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 이상 4대 정신을 바탕에 두고 독립과 민족 번영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제주흥사단은 1968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백응선 지사
백응선 지사

백응선 지사

백응선(白膺善) 지사의 본관은 수원. 호는 천야(天耶). 아버지는 백찬규(白燦奎), 부인은 안요원(安堯媛, 안세훈의 누님). 조천읍 조천리 2582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 만세 시위 운동에서 주동자 9명이 체포된 후, 백응선은 박두규(朴斗圭)·김필원(金弼遠) 등과 더불어 3월 22일 제2차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시위에서 박두규·김필원이 체포되었다. 3월 23일 제3차 시위가 조천 장터에서 시발되었고,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함덕리까지 행진하였다. 백응선은 김년배(金年培)·이문천(李文千) 등과 더불어 제3차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문천 등 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4차 시위는 3월 24일 조천장날이었는데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약 1,500명의 군중이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날 김년배 등 4명이 체포됨으로써 운동의 핵심 인물 14인이 모두 검거되어 만세운동은 일단락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1부에서 조선총독부 판사 죽미의마(竹尾義磨)·장야일랑(長野一郞)·전임래(田林來)에 의해 기각되었다. 6월형을 복역하고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20년 3월 28일 네 살 된 딸 하나를 남겨 두고 25살로 요절하였다.

약 6개월 후에는 부모도 홧병으로 돌아가시자 부인은 딸을 데리고 육지로 나간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문중에서는 형님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1921년 백응선을 제외한 투옥 동지 13명은 동미회(同味會)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미밋동산[味毛峙]의 동지(同志)'라는 뜻이다. 이들은 감옥에서 새끼를 꼬아 얻은 약간의 노임을 공동관리하기로 하고 김희수로 하여금 재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동미회 회원 13명은 뜻을 모아 제1차 사업으로 백응선의 묘비 건립을 서둘렀다. 이에 1922년 김시범(金時範)이 한문으로 글을 짓고 교래(橋來) '조린납' 지경의 묘지에 '고백응선군지묘(故白膺善君之墓)'란 비를 세우고 측면에 동지 13명의 이름을 썼다.

백응선의 묘는 교래리 산137-1번지에 있다. 15m×12m, 폭 1.5m, 높이 1m 정도 되는 산담 안에 부친의 묘와 나란히 있다. 묘의 방향은 북동향이다.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에서 위치 정보를 보면 위도 33-24-58-559999…, 경도 126-38-59-369999…로 나온다. 

비문 : 君諱膺善水原白氏燦奎子也丙申三月七日生庚申三月二十八日卒附葬于橋來境助仁納 考墓右坤坐原有一女己未春君與同志十四人宣傳獨立被逮服役盡期出獄而未半年奄作不歸客嗚呼哀哉銘曰嗚呼白君天耶命耶同志十四方其八獄也捨身輕若鴻毛及其出獄也誓心有如皎日嗚呼白君天耶命耶同志十四雖不與之同死徇從孰不爲之肝蝕腸裂嗚呼白君天耶命耶同志十四哭君 〈왼쪽〉靈而少一人慰君靈而銘短碣 檀君四千二百五十五年壬戌三月日 〈오른쪽〉金容燦 李文千 朴斗圭 金熙明 金章煥 金時殷 金慶熙 金弼遠 高載崙 金時範 金年培 黃鎭式 謹竪

“기미년 봄에 그대와 더불어 뜻을 같이 한 14명은 독립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복역을 마치고 그는 반년을 못 넘겨 불귀객의 되었도다. 오호라 슬프다! 마음속에 새겨 말하노라. 아아! 백군이여 천명이런가, 운명이런가! 동지 14명은 바야흐로 투옥되었지만 조국 독립을 위하여 내 몸 버리기를 홍모(鴻毛)와 같이 가볍게 여겼는데 급기야 일편 단심 맹세한 뜻은 출옥했을망정 옛날과 같도다. 동지들은 같이 죽지 못하고 타는 간장을 여미고 창자를 찢기지 못함이여. 아! 동지 13명은 군의 영전에 통곡하며 그대의 넋을 다소나마 위로하고자 짧은 돌에 글을 새기노라. 단군4255년 임술 3월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응선 묘비의 비문에는 일제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일본 연호를 쓰지 않고 날짜에 단기를 표시하였다. 백응선 묘비는 산간 오지에 세워져 '宣傳獨立'이라는 낱말이 들어가 있음에도 일제 당국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에 광복 후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독립유공 건국포장(褒章)을 추서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홍순만)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후 광복회에서 새로운 비석을 세워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유족이 아직 받아들일 여건이 안 되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비석 모조품이 항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항일기념관 해설사의 말로는 2019년에 백응선 묘비 모조품 앞에 꽃을 놓고 향을 피워 절을 하고 간 사람이 있다고 하였음. 인적 사항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고 함. 친딸의 후손일 가능성 있음. 

(글=제주흥사단)

동아일보 1926.05.20.
동아일보 1926.05.20.

김시숙 지사

김시숙(金時淑)은 개항기인 1880년에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조천에서 일찍 혼인하였으나 남자 못지 않은 개성 때문에 이혼하여 버리고 40세에 늦게 근대 학문 공부를 시작하여 세상에 눈을 뜨자 1925년 최정숙·강평국 등과 더불어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근대 민족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조천리에서는 야학을 열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일제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에 관련하여 경찰에 검거된 일이 있었다.

야학에 경비를 후원하는 사람들을 일경이 협박하여 후원금이 끊기게 되자 본인이 돈을 벌고 와서 계속하겠다고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사카에서 여성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였다. 당시 오사카의 제주 여성들은 방적공장 등에서 민족적 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여공들의 권익옹호를 위하여 여공보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권익 개선을 위한 노동운동은 곧 민족운동이었고 제주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또한 조천리 출신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고순흠이 결성한 신진회에 가입하여 여성부 책임자로서 항일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고순흠은 자신보다 13살 위인 김시숙의 강한 성격과 의협심에 항상 존경의 마음을 가졌다. 독립운동을 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나이가 훨씬 많았으므로 독립운동가들의 대모(代母)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김시숙이 오사카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고향 조천리 산92번지(조천공동묘지 옆 김해김씨 좌전)에 안장하였다. 다음 비문은 고순흠씨가 썼는데 김시숙씨와 고순흠씨의 진보적인 사고방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재래(在來)의 불합리(不合理)한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는 여자(女子)의 개성(個性)과 인권(人權)을 무시(無視)했다. 반역자(叛逆者)는 탕녀(湯女)라 하고 순종자(順從者)는 열부(烈婦)라는 거꾸로 된 지위(地位)를 얻었다. 이러한 모순(矛盾)된 사회(社會)에서 진정(眞正)한 열부(烈婦)라면 충실(忠實)한 반역자(叛逆者)의 무리일 것이며 동시(同時)에 비참(悲慘)한 시대적(時代的) 희생(犧牲) 계급(階級)이다. 어찌 부권(夫權) 전제주의(專制主義)의 맹목적(盲目的) 현모양처주의(賢母良妻主義)에 복종(服從)할 수 있었으리오. 결국 결혼 생활은 실패하고 40세에 궐기하여 初學을 略修한 후 부인 黎明 및 幼年 교육을 개척하고 渡日하여 工女勞動消組의 창업과 守成운동에 몰두하다가 시기가 不遇인지 그 사업도 모두 소멸되고 자신도 54세 되던 癸酉 7월 15일 대판 적십자병원에서 주인 없는 송장을 이루고 말았다. 그래서 기구한 처지가 같은 여성들끼리 護喪부인회를 조직하여 返柩하고 黃鷄山 아래 累塚 가운데 비석까지 세우게 되었다.  銘曰 ‘철저한 시대적 희생자며 충실한 여명 운동가여! 님의 몸은 비록 구학(溝壑)의 진흙이 되었으나 님의 피와 땀은 광명의 천지에 만인의 생명으로 나타날 날이 있으리라’ 韓亡後 27년 병자 7월 15일 세움. 고순흠 근지" 

김시숙 지사는 아직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글=제주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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