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8월이었다. 해마다 8월이면 전국여성농민대회가 열리고 제주에서도 대거 여성농민회원이 상경하여 대회를 치러내는데 그 해 태풍이 여성농민대회 인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하였다. 제주도연합에서는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나를 포함하여 총 4명의 여성농민만이 상경하였다. 

여성농민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으나 북상 중이던 태풍이 대회를 마친 시간에 마침 제주 상공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내일은 중부지방으로 북상하여 내일도 비행기를 타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느긋하게 즐기다 가자고 합의를 본 상태였다. 하지만 태풍이 제주에 곧 상륙한다는 소식에 밭에 있는 농작물 걱정이 한가득이다. 저녁이 되면서 숙소에도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태풍이 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숙소는 부천 한옥마을이었다. 태풍이 우리 여성농민을 호강하게 해 주었다. 제주에 귀농하기 전 경기도가 주 활동무대였던 안나 언니가 인맥을 동원하여 고급(?)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조금 이르게 도착하여 마을을 둘러보다가 도시 농부들이 알뜰살뜰 가꾸고 있는 도시 텃밭을 발견하였다. 

참외. (사진=김연주)
참외. (사진=김연주)

저마다의 개성으로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다양한 농기구들이 한켠에는 정리되어 있었고 수확을 마치고 다음 작물을 준비하는 빈터가 있는가 하면 무성하게 작물을 키워내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둘러보다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토종 먹골참외이다. 

노란색 참외가 아니고 진초록인 껍질을 가졌고 씨앗은 붉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수확을 마치고 쭉정이들은 그냥 밭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씨앗 색이 특이해서 그랬는지 씨앗이 더 많다고 느껴졌고 더 딱딱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참외에 홀딱 반한 나는 벌써 씨앗을 예쁘게 갈무리하여 잘 챙겨 두었다.

그다음 해 기대하던 토종 먹골 참외를 심어 맛을 볼 기회가 왔다. 늘상 보아오던 노란 참외와는 달리 익어도 색이 노랗게 변하지 않아 언제 따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적당하다 싶을 때 수확하였다. 외모는 단단하게 생겼고 참외 배를 반을 가르니 흡사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아보카도 느낌이었다. 

토종먹골참외. (사진=김연주)
토종먹골참외. (사진=김연주)

참외가 많이 열리지 않아 주위의 여러분들과 함께 맛을 볼 수는 없었으나 우리가 맛본 참외는 독특하면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겉이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것도 맘에 들었다. 단단한 참외이지만 맛을 보면 식감은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잘 익은 멜론을 먹는 느낌이랄까? 껍질째 먹어도 걸리적거리지 않고 부드러웠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단단한 씨앗을 긁어내고 먹어야 하니 달콤함을 조금은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동안 재배해오던 사과참외가 잘 무르는 점이 아쉬웠던 터라 먹골참외는 충분히 단단하고 해충피해도 훨씬 덜해 만족스러웠다. 

5월 모종을 내고 6월 밭에 정식하고 7월 ‘폭풍성장’하여 한 차례 먹골참외 수확을 하였다. 첫 수확인데도 제법 많은 양이었다. 맛을 보고 수확시기를 제대로 가늠하고, 잘생긴 참외의 외모를 보며 감탄하고 며칠 후 있을 본격적인 수확을 기다렸다. 

그 녀석의 습격을 받은 토종먹골참외. (사진=김연주)
그 녀석의 습격을 받은 토종먹골참외. (사진=김연주)

그런데 다음 수확을 기다리던 먹골참외밭에 침입자가 있었다. 단내가 나는 참외를 모조리 작살을 내버렸다. 한참 폭풍 성장 중이던 참외 덩굴은 짓밟혀 망가져 있고 참외는 먹다가 버려진 것이 지천이다. 멧돼지의 소행일까 여쭤보니 멧돼지는 참외밭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을 거란 이야기였다. 

6월 어느날 참외밭에 도착하였을 때 강아지 발바리 만큼한, 그러나 조금 더 똥똥한 네발 달린 짐승의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엉덩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참 귀엽다 생각했고 너구리 같다고 생각했었는 데 그 녀석의 소행인 듯하다. 제주에 설마 너구리가 있을까? 분명 처음 보는 녀석이긴 했고 참 귀여운 외모를 갖고 있었는데, 말이 통했으면 집에 데리고 가 같이 살고 싶을 정도였는데.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그 녀석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그 녀석 때문에 참외를 한알 한알 양파망으로 감싸는 작업을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해야만 했다. 양파망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익어서 단내가 폴폴 나는 참외는 그 녀석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토종먹골참외 씨앗. (사진=김연주)
토종먹골참외 씨앗. (사진=김연주)

우여곡절 끝에 제법 많은 양의 참외를 수확하였고 소비자를 만날 기회도 가져보았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덕분에 이런 참외를 다 먹어보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도 제법 들었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씨앗 돌려받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소비자들은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수박과 참외를 먹고 나서 씨앗을 잘 갈무리하여 생산자에게 돌려주면 다음 농산물을 10% 할인하여 주는 프로젝트였다. 몇 분의 소비자가 보내준 씨앗이 있어 내년 봄이 되면 전국의 많은 텃밭농부들에게 나눔도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내년에는 더 많은 농민들이 먹골참외를 생산하고 더 많은 소비자들이 먹골참외를 맛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부천 한옥마을 텃밭에는 아직도 먹골참외를 재배하는 도시농부가 있을까? 인사도 못하고 허락도 없이 가져다 이곳 제주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걸 애초의 먹골참외재배 농민은 알 리 없고….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3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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