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는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거나 허용기간을 넘겨 국내에서 살고 있는 국제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라고 부른다. 이런 표현은 형사적 범죄를 저지른 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어왔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불법 체류자’ 대신 ‘미등록 체류자’라는 용어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국제이주기구(IOM)에서 발간한 용어집(Glossary of Migration)에서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민법을 위반한 자를 형사범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이런 변화를 불러온 노력과 의도를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불법체류자’라는 말의 폭력성을 문제삼을 때, ‘불법’이라는 표현에만 초점이 맞춰질 뿐 ‘체류자’란 말에 대한 문제제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만들 수 있게 된 편견, 혐오 그리고 차별의 핵심은 ‘체류’라는 말 속에 숨겨져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이주인권가이드라인』의 총론에는 ‘이주민현황’이라는 제목 밑에 ‘체류 외국인 규모’,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미등록 체류자’ 등의 소제목이 달려있다. 불법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이러한 소제목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나는 ‘체류 외국인’이 되고 ‘등록된 체류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 개념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다.

이 말에 공감이 안 된다면 ‘한국에서 체류하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거나, “한국인인데 굳이 한국에서 체류한다는 말을 사용해야 하나?”라고 느낀다면, ‘체류’라는 말이 대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한국에 사는 한국인(‘자국’에서 사는 ‘자국인)에게 적용하기 어색하거나 불편한 것인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체류’라는 어휘로만 본다면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국’ 혹은 ‘고향’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숨겨져 있다. 그곳에만 뿌리를 내리고 뿌리 내린 곳에서는 주인이 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손님혹은 이방인으로 머물다가 언젠가는 다시 ‘조국’이나 ‘고향’로 돌아간다는 가설. 

이런 가설은 어느새 (구조화된)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 따라 정부와 법무부는 체계적으로 국민 중심의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기반이 되는 ‘체류의 체계’를 함께 날조해냈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외국인/비국민에 대한 법무부의 ‘통제’는 외국인/비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법무부에서 이주정책을 수립할 때는 언제나 이주민과의 소통을 생략하고 국민에만 그 무게중심을 두고 만들어진다. 이주민은 사실상 법무부/국민의 ‘식민통제’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법무부의 통제 하의 이주민들의 삶은 ‘살다’라는 동사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체류’라는 명사로 가로막혀 있다. 이주민에게 삶은 체류자격에 달려있는 체류의 연장선일 뿐이다. ‘체류’라는 용어는 마치 법무부 출입국관리의 전문용어처럼 간주될 지 몰라도, 내게는 이주민을 향한 전문적인 차별행위의 시작인 것만 같다. 

‘체류’란 나에게는 편견이 되는 ‘가설’이자 차별이 되는 ‘체계’이다. 내 삶의 여정을 따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존엄하다고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 삶의 뿌리를 따로 떼어내서 ‘조국’이나 ‘고향’ 같은 곳에 남겨놓고 떠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삶이고 내 삶은 나다. ‘체류’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과 억압적인 체계로 내 삶을 조각조각 분해당하고 싶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체류 따위 그만 하고 싶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귀화라는 길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나는 귀화 또한 거부한다. 체류비자에 달려있는 삶이 존엄하지 않은 것처럼 국민의 삶도 존엄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것은 국가에서 벗어날 때 체류자가 될 존재다. '자국'에 머물때는 자신의 뿌리가 따로 분해당하는 것을 못 느낄 뿐이다. 사실은 국민과 체류자는 체계 속에서 한 세트를 이룬다. 자국에 있을 때 국민이어야 하고 타국에 이주하거나 도망칠 때는 체류자여야 한다.

체류자에서 국민이 되는 귀화의 길은 국민과 체류자의 체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 오히려 그 체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체류자된 내가 한국사회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귀화 또한 거부하는 것이다. 체류자만 되기 싫은 것이 아니라 국민도 되기 싫다. 국민과 체류자가 한 세트인 것처럼 병역거부와 귀화거부도 한세트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억압에서 해방으로 가는 길을 바라는 것이지 억압받는 자에서 억압하는 자로 '계급상승'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과 체류자의 가장 큰 구조적 차별은 국민의 인권이 헌법에 의해 국민기본권의 형태로 구현된다는 점에 있다. 체류자의 인권은 국내법에 의해 구현될 수 없다. 헌법제6조에는 “①헌법에 의하여 체결ㆍ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②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라고 나와있지만, 국가 주권의 주체인 국민이 이주민의 인권을 국민기본권과 평등하게 실현하지 않으면 국민기본권은 '인권'이 아닌 '특권'이 되고 만다. 이런 특권을 확보하려다보니 국민국가의 가장 큰 시대적 특징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바로 분단이다.   

한국사회에서 분단이라고 하면 남북분단을 바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어휘로 다룬다면 분단이란 하나이어야 하는 것(연결됨)을 어떤 수단으로 분해시켜버린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남북한이 하나여야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온전한(하나인) 나여야 하는데 국민국가 체계는 한 사람인 나를 국민과 체류자로 분리시켜버렸다.

“국가의 분단경향”으로 인해 나타나는 “분단의 모습”을 살펴본다면 크게 안전의 국가안보화, 즉 국가안보의 분단이 있고, 국민과 체류자라는 사회구성원 계급의 분단이 있다. 

분단이 보편적 특권을 확보하는 현상을 일으킨다고 해석해 본다면 해결책는 어느나라의 통일교육도 아니고, 국가안보강화도 아닌, 특권에서 인권으로 평등해지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달려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통일교육과 국가안보강화는 분단을 강화하는 데에만 기여한다.)

누군가의 추방, 입국거부, 보호란 이름 하의 자의적 구금 등 체류자 상대로 행하게 되는 폭력은 남북분단에서 생긴 DMZ (비무장지대)에서 울리게 되는 총소리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휴전선에서 종용한 것 같지만 전쟁은 체류자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 몸이 분단선이고, 체류자인 내몸이 국가로부터 완전한 안전을 느낄 때까지 이 사회의 분단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전 말고 이제 그만 전쟁을 끝내자!

에밀리
에밀리

글쓴이 에밀리는 대만 출신이다. 제주에서 정착하기 전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랬고, 지금 제주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제주에서 아이를 낳았다. 육아에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다 쏟아붓는 일상 속에서 제주의 '인간풍경'을 글에 담고자 한다. 이 땅의 다양성을 더 찬란하게, 당당하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달 마지막 주말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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