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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읽기]공동체 혹은 폭력의 골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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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읽기]공동체 혹은 폭력의 골격
  • 노지
  • 승인 2021.09.0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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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
데버라 펠드먼 지음, 홍지영 옮김, 사계절
데버라 펠드먼 지음, 홍지영 옮김, 사계절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
데버라 펠드먼 지음, 홍지영 옮김, 사계절

2021년 여름,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는 부르카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뉴스. 그래서 궁금해졌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살아남기 위해서 부르카를 사는 여성들이 있는데, 우리는 대체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 걸까. 그나마 그것은 평화로운 소식이다. 카불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여성들 중에는 아이만이라도 데려가라고 아우성이었다. 아이를 제 품에서 떼어내 공동체의 바깥으로 내던지는 일들은 어떻게 상상해보아도 아찔하다.

사진을 한 장 보았다. 언론을 통해서 공개된 50년 전 카불 거리의 여성들. 1972년의 그녀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경쾌하게 걸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다른 시간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웃었다. 그 사진은 질문을 하게 만든다. 대체 미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난 해 넷플릭스 화제작 중의 하나인 <그리고 베를린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것은 왜 과거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가. 뉴욕에는 자본과 자유 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극단적 공동체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이를 테면,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후 유대인의 인구 회복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는 초정통파 하시딕 공동체 같은. 여기서 여성들은 출산의 도구로만 존재한다. 배울 수 없고, 책을 읽을 수 없고, 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할 뿐이다. 내 딸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라고 이번 생을 참아도,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 것과 미래가 오는 것은 다르다.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는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원작 실화다. 영상과 마찬가지로 한 호흡으로 달려 나가기 곤란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기를 권한다. 그래야 붙잡히지 않을 수 있다.

짐작하겠지만 우리를 붙잡는 것은 ‘우리’다. 가족이거나 이웃이거나 내부자다.

“우리 집안에서는 가족끼리 포옹이나 키스를 하지 않았다. 서로를 칭찬하지도 않았다. 대신 우리는 서로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언제든지 누군가의 영적 결함이나 신체적 결점을 지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끼리 살던 대로 살도록 최면을 거는 이들도 우리를 붙잡는다.

“하시딕 사트마 유대인이 입는 독특한 옷은 내부자와 외부자 모두에게 두 세계 사이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동화(assimilation)가 홀로코스트의 원인이었어요. 우리가 다시 주변과 섞인다면 신을 배신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우리를 붙잡는 사랑은 때로 잔인하다. 우리 말고 그들에게 가차 없을 때조차 우리는 사랑을 무기로 쓴다.

“끔찍한 범죄자에게도 이토록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측은지심이라니, 얼마나 관대한가? 바로 무차별적인 사랑, 정당하지 않은 사랑이 하시딕 유대인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처벌은 하늘에 맡기고 우리는 그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 힘쓸 뿐이다.”

이방인을 허락하지도 않고 이방인이 되기를 허락하지도 않는 공동체는 끔찍하지만 무시로 존재한다. 탈레반이 아니어도, 하시딕 공동체가 아니어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배척하려드는 어떤 공동체 거주민들도 도처에 존재한다. 국가와 민족과 종교와 지역사회, 남자와 여자, 세대와 세대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폐쇄성은 가면을 쓰고 어디에나 끼어 있다. 그들은 폭력과 사랑을 동시에 동원한다.

‘밖으로 나온 아이’인 저자 데버라 펠드먼은 이방인으로서 베를린에 사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쓴다.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발견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베를린은 하시딕 및 정통파 유대인 공동체를 떠난 사람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망명자와 도망자로 가득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그 자체다. 모래와 늪 위에 건설되어 누구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도시라고 주민들이 농담 삼아 얘기하는 이곳은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뽑은 사람과 남에게 뿌리 뽑힌 사람들이 함께 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1972년의 카불 거리의 여자들, 부르카를 사거나 아이를 탈출시키는 여자들, 난민의 이름으로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를 살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를 탈출해 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뿌리내리려는 데버라 펠드먼을 하나씩 떠올리며, 나는 정말 궁금하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으로서는 이런 것만 안다. 공동체가 미래를 선물해주지는 않는다는 것, 누군가는 자꾸만 도망치고, 그 도망치는 방향으로 공동체가 굴러가야 한다는 것.

쉿! 또 누군가 어둠을 뚫는 화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미래가 시작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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