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밭. (사진=플리커닷컴)
감자밭. (사진=플리커닷컴)

계속된 비 날씨로 미루었던 감자를 심었다. 아니 재를 묻힌 감자를 흙속에 묻었다. 봄감자는 씨감자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심지만 가을감자는 통째로 묻는다. 늦여름에 감자를 절단해서 심으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씨감자는 줄기를 뻗으며 작은 알들을 매달고, 가을햇빛을 모아 그 알들을 키워낼 것이다. 서리가 내리면 줄기를 잡아 당겨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거두어들였다가, 눈이 내리는 날 포슬포슬 삶아내어 가족들과 후후 불어가며 먹을 것이다. 

상상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로 이어진다. 가족으로 보이는 다섯 사람이 허름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일하던 복장으로 램프 불빛 아래서 저녁을 먹는 사람들은 밭에서 막 돌아왔음이 틀림없다. 노동의 흔적이 새겨진 그들의 얼굴과 손은 투박하고 거칠다. 

하지만 직접 캔 감자를 먹는 그들의 표정에서 노동의 정직함과 고단함, 그리고 힘든 하루를 오늘도 살아냈다는 안도감이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감자들이다. 그래서일까. 빛나는 감자를 권하는 그들에게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반 고흐 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반 고흐 작.

3000여 년 동안 옥수수와 함께 잉카문명을 먹여 살렸던 감자는 1542년 잉카문명을 멸망시킨 스페인 원정대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감자가 전해졌을 때 유럽인들은 감자를 가축이나 미개한 원주민이 먹는 음식이라며 터부시하였다. 특히 점이 박힌 울퉁불퉁한 감자의 겉모양은 당시 유행하던 천연두를 연상시켜 편견을 부채질했다. 

편견은 1630년 프랑스의 브장송의회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며 감자재배를 금지할 정도로 일반적이었다. 바보를 뜻하는 ‘포테이토 헤드(potato head)’나 좋지 않는 일로 이슈가 되는 것을 뜻하는 ‘뜨거운 감자(hot potato)’는 이런 분위기에서 생겨난 단어들이다.  

하지만 거듭되는 전쟁과 흉작은 ‘악마가 먹는 음식’으로 알던 감자를 주식으로 격상시켰다. 1774년 프로이센에 대흉작이 발생하자 프리드리히왕은 감자를 심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편견에 사로잡힌 농민들은 감자심기를 거부하였다. 

왕은 하지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이용하여 “감자는 귀족만이 먹을 수 있다.”고 선포하고, 근위병으로 하여금 감자밭을 지키게 하였다. 농부들이 감자를 훔쳐 심기 시작하면서 감자재배가 일반화되었다. 독일인들은 지금도 프리드리히왕의 무덤에 감자를 두고 오는 것으로 왕의 공로를 기린다.

감자. (사진=플리커닷컴)
감자. (사진=플리커닷컴)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지가 초지로 바뀌면서 영국은 밀이 늘 부족하였다, 단위면적 당 생산량이 많고 비타민C가 풍부한 감자가 재배되면서 하층민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났고, 수백 년 동안 괴롭혀 왔던 괴혈병도 사라졌다. 그 결과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굶주림을 면해 산업혁명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수확한 밀을 영국에 바치고 나면 먹을 것이 거의 없었던 아일랜드에게 감자는 축복이었다. 하지만 축복은 재앙이 되었다. 종자가 아닌 영양체로 번식하는 감자는 유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전염병에 취약하다. 잉카제국은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 경작지를 바꾸며 여러 품종의 감자를 재배했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매년 같은 밭에다 같은 품종을 심었다. 1841년~1845년 감자 역병이 발생하자 모든 감자 밭이 쑥대밭으로 변해 인구 8백만 명 중에 백만 명이 굶어죽고 백만 명이 이민을 떠났다. 케네디 집안도 이 때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감자가 들어온 것은 1824~1825년이다. 감자가 처음 들어왔던 관서지방에서는 감자를 북쪽에서 온 고구마라고 해서 ‘북감저’라고 불렀다. 그러다 감자라고 불렸던 고구마가 고구마로 불리면서 북감저는 감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 이유로 제주도에서는 아직도 고구마는 ‘감저’이고 감자는 ‘지슬’이다. 소설 <감자>에서 복녀가 채마밭에서 훔친 것은 감자가 아니고 고구마이다. 작가 김동인이 관서지방 출신이여서 벌어진 일이다.  

제주에서 감자가 상업적으로 재배된 것은 일본에서 대지마 품종이 들어오면서이다. 1년2기작이 가능한 제주에서는 겨울철에 출하하는 감자의 재배면적이 꾸준히 증가하여 2005년에는 6,174ha에 이르렀고, 전국 생산량의 25%를 담당하였다. 

더뎅이병이 발생한 감자(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더뎅이병이 발생한 감자(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하지만 기후 온난화로 풋마름병과 바이러스 등 병충해가 증가하고 연작에 따른 더뎅이병의 만연으로 2011년에는 2,814ha로 급감하였고 2020년은 711ha까지 줄어들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대구에서 사과재배가 사라졌듯이 제주에서의 감자재배도 사라질 것이다. 

농업은 기후의존성이 높아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휴대폰과 자동차를 팔아 번 돈으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라는 논리로 농업을 경시해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1.7%로 국민 한사람이 연간 550kg의 외국산 농축산물을 먹고 있다. 기후재앙이 더욱 심화되어 세계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식량자급기반이 무너진 우리나라는 아일랜드처럼 대재앙에 빠질 것이다. 

불명예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온실가스배출량은 세계 7위이고, CO2배출 증가율은 OECD 국가에서 1위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대응지수는 58위에 그치고 있다. 농업은 CO2를 흡수하고 O2을 배출하는 기능에 있어 지리산 171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농업과 임업을 살림으로써 온실가스 흡수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식량자급 뿐만 아니라 탄소중립을 이루는데도 효과적일 수 있다. 화석연료로 만든 에너지로 움직이는 전기차 공급을 확대하고, 삼림을 베어내어 태양광 단지를 설치하는 정책이 공공연하게 추진되는 이유는 산업과 자본의 관점에서 탄소중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관련된 현 상황은 너무나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타 툰베리 등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행동을 보면서 애써 희망을 갖는다. 필자부터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라는 툰베리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어른이고 싶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격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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