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콘센트 (사진=김지민)
영국 콘센트 (사진=김지민)

8월 중순 즈음 아래층에서 불이 났다. 옆 건물도 아니고 바로 아래층에서 불이 났으니 보통은 꽤나 심각한 장면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뭔가가 활활 타오르는 상황, 시커먼 연기가 자욱한 복도, 귓가를 시끄럽게 때리는 화재경보기 소리, 혼비백산하여 탈출하는 사람들 등등.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의 상황이었다. 사실 창문 밖으로 간간히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불이 났는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웃이 담배를 피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집인지 확인하려 창문을 열자마자 맡은 냄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현관문을 열어 복도를 확인했으나 화재경보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연기가 보이지도 않았으며, 무언가 타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불이 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짐을 챙겨 두자는 생각으로 빠르게 노트북과 여권 따위의 귀중품을 챙겼다. 짐을 다 챙길 때 까지도 경보가 울리지 않아 의아해하던 찰나 다시 현관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우리 층이 아닌 다른 층에서 울리는 듯한, 다소 멀게 느껴지는 화재경보기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확인차 관리실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내 아래층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진입했다고 알려 주었다. 바로 아래층에서 불이 났다고? 대피를 하지 않아도 되냐는 내 물음에 관리인은 화재대비 설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집안에만 있으면 안전하지만 그래도 대피를 하고 싶다면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고 안내했다. 듣고 보니 비슷한 내용을 입주민 매뉴얼에서 읽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대피를 결정했다. 화재대비 설계를 어떻게 믿고? 

아직 실내공사가 진행 중인 층들도 있어서 계단으로 대피하는 인부들 틈에 섞여 지상층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다 내려와 보니 소방차 5대가 도로를 봉쇄하고 대기 중이었다. 소방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집에 들어갈 수 없다기에 집 앞의 카페로 잠시 대피해야 했다. 연기나 냄새 등의 피해가 있을 경우에 대비해 그날 밤 묵을 수 있는 가까운 호텔을 검색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런 걱정들이 무색했다. 아래층 화재의 그 어떤 티끌을 볼 수도, 맡을 수도 없었다.

그날 밤 관리실에서는 입주자들에게 화재대피 안내문과 함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생각보다 자세하고 투명하게 공유했다. 화재의 원인은 양초였는데, 초를 켜 둔 채 외출을 했다고 한다. 화재를 감지한 스프링클러가 소방관이 출동하기 전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었고 상황은 금방 정리된 것 같았다.

아파트 건물의 화재대비 설계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는데, 최대 1시간까지는 불이 진원지에서 번질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소방관의 대피 지시를 받지 않는 한, 보통은 집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만약 대피 지시가 있을 경우, 계단으로 대피 후 아파트 앞의 공터로 집결하라며 집결 장소가 표시된 지도를 함께 안내했다. 뿐만 아니라 우편함 앞에 화재위험요소 및 안전수칙 등을 안내하는 소방서 브로셔가 비치되었고, 우편함 안에는 무료 화재예방점검을 정기적으로 하라는 내용의 안내 엽서가 들어있었다.

영국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소소하게 안전에 대한 사회 감수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콘센트는 전력 차단을 위해 켜고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 냉장고와 같이 항상 켜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면 꼭 이 스위치를 끄는 습관을 권장한다. 물의 사용이 잦은 화장실 내에는 콘센트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면도기용의 작은 콘센트가 주로 선반 속에 숨어 있는 경우가 있긴 하다.)

또한 주기적으로 전문조사원들이나 관리인들이 집안의 화재 감지 장치들을 점검한다. 헬스장을 등록해도 첫날은 무조건 기구 사용법과 함께 화재대피경로에 대한 안내를 받아야 한다. 내가 처음 학교 사무실을 배정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화재안전교육은 초등학생 때 학교 운동장에서 소방관 아저씨들이 소화기를 쏘는 모습을 구경한 것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훨씬 제대로 된 교육이었다.

담당자와 함께 박사생들의 사무실에서 건물 입구까지 정해진 대피 경로를 따라 나와 집결장소까지 가 보았다. 처음 와 보는 건물이니 사무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은 당연한데 직접 대피경로도 걸어 볼 줄은 몰랐다. 그는 준비해 온 목록에 꼼꼼하게 체크를 해가며 소화기의 위치, 대피 주의사항, 그리고 방화문의 사용법까지 알려줬다. 그렇게 교육을 마친 후에야 학생증을 사무실 출입 시스템에 등록해 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온라인으로도 화재안전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소화기의 종류부터 대피요령까지 짧지 않은 교육 후엔 퀴즈도 풀었는데, 만점을 받지 않으면 이수를 완료할 수 없었다.

이후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실제 화재상황을 가정한 대피 훈련을 난생처음 해 보았다. 화재경보기가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다들 빠르게 건물 밖의 지정 집결 장소로 모였다. 형광 노란색의 조끼를 착용한 관리직원들은 대피 경로를 안내하고 집결장소의 인원을 체크했다. 모두가 대피한 것을 확인하고 건물 점검 등의 정해진 절차들이 끝난 후에야 사무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모두가 진지했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던 훈련에 내심 감동했다.

나는 왜 화재대피훈련에 뭘 굳이 감동씩이나 했을까. 나는 왜 집안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도 굳이 대피를 했을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나와 비슷한 반응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로 스프링클러와 화재경보기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정말로 화재대비 설계가 제대로 되어 있는가? 가만히 있다가 더 위험해지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렇게 의심에 의심을 거듭했던 것은 한국 사회가 나에게 안전에 관한 기본적인 믿음을 주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는 구성원의 안전 보호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는 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다. 나는 아직도 나보다 겨우 몇 살 어렸던 친구들이 비명에 간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를 기억하고 있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도 기억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계속해 일어난 화재 및 안전사고들과 그 후속 대처들을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가 과연 구성원들의 안전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지속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인재는 예방이 가능하다. 물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방하진 못 할지라도 올바른 정책과 대비책, 그리고 지속적인 훈련으로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분명 우리도 화재 안전 등에 관한 법령과 시행규칙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기능하고 지켜지고 있는가? 지키지 않을 경우 처벌과 제재를 충분히 하는가? 분명 누군가는 그래도 소 잃은 외양간을 고쳐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텐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그게 아니면 원래 외양간은 이런 곳이니 받아들이라고 부실한 외양간을 다음 소들에게도 제공할 것인가. 누군가의 상실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할 텐데, 안전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상실된 사회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각자도생해야 할까. 

 

 

 

 

 

 

김지민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제주 4·3에 대해 연구 중인 김지민은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와 런던을 잇는 [지민in런던]은 매월 둘째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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