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란 유령이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 야당대표가 ‘공정경쟁’을 내세워 인기를 끌기도 하고, 많은 청년들이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 등을 놓고 ‘공정한 기회’를 박탈한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사회 곳곳에서 ‘공정’이 입길에 오르내리고 그 의미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공정’이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된 듯하다.

그렇다면 ‘공정’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공정’은 ‘공정’한가. ‘공정’은 당연히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공적인 선을 위한 규제와 조정보다 개인이나 시장의 능력과 경쟁력을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구조적 불평등은 필연적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부의 불평등은 최고 수준에 차올랐고, 흙수저-금수저 계급론이 상징하는 부의 대물림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절대다수가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의 굴레를 쓰게 되었지만 극소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평생 그 굴레를 벗기란 불가능하다.

불평등의 절망에 대항하는 최근의 흐름이 능력주의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불평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얼핏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제도적 기회는 형식적으로 평등할 수 있으나 그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조건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 형편이 담보되지 않으면 사다리를 올라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를 사회적 패자로 추락시키는 것이 기회의 평등, 능력주의의 진실이다. 서울대학교 재학생 중 40%가 강남3구 출신이라는 것이 능력주의의 결과이다. 기회의 평등만으로는 결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거니와 오히려 문제의 근원을 은폐할 뿐이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차별과 특권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경쟁을 통과한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신성불가침한 특권으로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내면화한다. 인천국제공항이나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에 대한 반응이 대표적이다. 누구도 처음부터 비정규직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1990년대말 자본과 국가의 요구에 의해 이전에 없던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나타났고, 새롭게 사회에 진출하는 노동자 중 다수는 경쟁에 밀려 비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의 삶을 강요당했다.

그로부터 이십여년 이상이 흐른 지금 한국사회에서 단지 시험이라는 과정에서 탈락한 비정규직은 차별당해도 당연하고 배제당해도 마땅한 불가촉천민이 되어버렸다. 불가촉천민이 정규직에 준해 정당한 처우를 요구하는 것은 경쟁을 이겨낸 능력자인 정규직의 권리를 넘보는 불경죄인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기울어진 경쟁의 결과를 근거로 차별하고 배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개인의 능력과 경쟁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로부터 파생된 불평등을 극복하는 해답이 경쟁으로 삶을 결정짓는 능력주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정’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을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기회만 평등하면 된다는 주장은 최면에 불과하다. 부의 대물림이라는 세습자본주의가 뿌리내린 지금 한국사회에서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는 위선적 ‘공정’일뿐이다. ‘공정’을 가장한 기득권의 반칙과 편법을 정당화할 뿐이다. 길게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근본적 방안이겠지만, 당장은 정당한 이유도 없이 배제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의 권리를 제도적으로라도 보장할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경쟁을 강요당하며 파편화 되어버린 개인들의 삶의 방향타를 공동체 복원으로 되돌려야 한다. 무엇보다 ‘불평등한 공정’에 순응하지 않고, 나를 둘러싼 울타리를 넘어 체제로부터 외면당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의 ‘연대’를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진짜 공정’으로 가는 길이다.

부장원 민주노총제주본부 부장원 조직국장
부장원 민주노총제주본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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