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앞에서 김성인 소송마을 이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앞에서 김성인 소송마을 이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재작년에 제주에 가서 작은아버지가 했던 일을 쭉 봤는데…. 이분이 정말 훌륭하시더라고. ‘진짜 군인이다’했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해서 국회의원을 하라는 제안도 받았는데 ‘군인으로 남겠다’ 했던 분이었어. ‘참군인’이셨지.”

지난 18일 오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 금오산 끝자락에 위치한 붉은 슬레이트 지붕 집. 제주4·3 당시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지 않겠다”며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했던 김익렬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이날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동부팀(팀장 오화선)은 김 장군이 송문리에서 태어났다는 기사 한 줄을 근거로 금남면사무소를 찾았다. 사무소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인근 마을이장들에게 수소문을 해 김 장군의 조카인 김성인씨(68)를 만날 수 있었다.

김씨는 10여 년 전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금남면 송문리 소송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그는 김 장군의 생가를 안내하며 자신이 기억하는 삼촌 ‘김익렬’에 대해 들려줬다. 김 장군은 어릴 때 매일 몇 시간을 산을 넘어 대치리에 있는 학교를 다녔을 만큼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김씨는 “삼촌이 보통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다”고 웃으며 “힘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뭔가를 해야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반발도 많이 하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며 화도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앞에서 김성인 소송마을 이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김 장군은 학교를 가기 위해 뒤편으로 보이는 금오산을 매일 같이 넘어다녔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앞에서 김성인 소송마을 이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김 장군은 학교를 가기 위해 뒤편으로 보이는 금오산을 매일 같이 넘어다녔다. (사진=조수진 기자)

김 장군은 10대 중반까지 하동에 살다가 둘째 형이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해방이 되자 귀국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 멤버로 참여했다.

1947년 9월 제주에 주둔하던 제7여단 제9연대에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948년 2월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딘 미군정장관은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김익렬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이후 4월28일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은 대정면 구억리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72시간 내 전투를 완전히 중지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등의 내용으로 합의했다.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딘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인물이 유해진 지사로 기록돼 있으나, 이후 확인 결과 안재홍 민정장관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딘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인물이 유해진 지사로 기록돼 있으나, 이후 확인 결과 안재홍 민정장관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그러나 협상 사흘 만인 5월1일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는 오라리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5월3일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졌다. 김익렬 연대장은 끝까지 초토화 작전에 반대하다가 5월6일 해임됐다. 그 자리에 박진경 중령이 들어오며 강경진압 작전이 본격적으로 감행됐다.

김익렬 연대장은 제주4·3과 관련된 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진상을 밝히는 기록을 남겼다(유고록 <4·3의 진실>). 그는 “4·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집필 사유를 밝혔다.

“시골사람들은 옛날에 ‘우(右)’냐, ‘좌(左)’냐 구분해서 살지 않았어. 우리 작은 아버지는 정의롭게 살겠다 그거였던 거지. 제주에 가보니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하도 제주도민들한테 험하게 하니까 삼촌이 그렇게 하신 건데…. 그 일을 가지고 ‘극좌’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많았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사진=조수진 기자)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사진=조수진 기자)

김씨는 창고를 정리하다가 귀한 문서도 발견했다고 한다.

“우리집에서도 나만 알 거야. 큰 광에 쌓여있던 걸 정리하는 데 옛날 문종이가 접혀 있길래 펴보니까 김구 선생의 글인 거야. 그때가 1970년대였는데 김구 선생이라고 하면 ‘극좌다’ 이런 시선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얘기도 못했지. 다시 접어서 놔뒀는데 나도 모르는 새 잃어버렸어.”

그는 매우 아쉬워하며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작은 아버지가 제주도를 위해서 했던 일에 대해 김구 선생이 감사해했던 내용이었다”고 떠올렸다. 김 장군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가족에게도 말을 아꼈다고 한다. 제주4·3은 모두가 쉬쉬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김씨 역시 노무현 정부 들어서며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하고 나서야 가족들과 또 마을사람들에게 삼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앞에서 김성인 소송마을 이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위치한 김익렬 장군 생가 앞에서 김성인 소송마을 이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 장군 생가가 있는 경남 하동군 바로 아래 지역이 박진경 대령이 태어난 경남 남해군이다. 남해읍 앵강고개에 만들어진 남해군민동산 왼편에는 박진경의 동상이 서 있다. 

박진경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며 부임한 지 한 달 여만에 주민 수천명을 체포했다. 중산간 마을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였다.

한 언론은 “경비대와 경찰에 체포된 자는 약 6000명에 이른다”고 보도했으며 당시 종군기자 조덕송은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 중엔 12~13세 되는 소년, 60이 되는 늙은이, 부녀자까지 어느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지”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지난 18일 도외 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동부팀이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앵강고개에 조성된 남해군민동산 내 박진경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도외 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동부팀이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앵강고개에 조성된 남해군민동산 내 박진경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결국 박진경은 대령 승진 축하연이 열렸던 6월17일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다음날 18일 새벽 암살당했다. 같은 민족을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작전을 따를 수 없었던 부하들의 총탄에 숨진 것.

하지만 남해군민동산에 세워진 박진경의 동상 뒷면에 새겨진 추모문에는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과 다른 문구들이 나열돼 있었다. 무차별 주민 체포작전에 대해선 “제주도민의 생명재산보호와 사태수습 명을 받은 공(박진경)은 불과 2개월 내 소위 공산반란 해방군 주력을 섬멸”했다고, 또 그의 죽음에 대해선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앵강고개에 조성된 남해군민동산 내 박진경 동상 추모문. 사실과 다른 역사가 새겨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앵강고개에 조성된 남해군민동산 내 박진경 동상 추모문. 사실과 다른 역사가 새겨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역사회에서도 박진경 동상을 두고 철거 또는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남해지역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남해지역운동연대회의는 지난 2001년과 2005년 동상 이전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박진경의 양아들 박익주 전 국회의원 등이 강력히 반발해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김영진 경남도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월 도의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5분 발언을 통해 “추모해선 안 될 인물을 남해군이 추모비와 동상까지 세웠다. 박진경 동상을 철거하든지, 존치한다면 명확한 사실을 명시한 ‘단죄비’를 세울 것을 제안한다”며 “거짓을 바로잡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공론화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피력했다.

한편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올해 4·3 전국화를 위해 유적지 기초조사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꾸려졌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연구소, 제주다크투어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