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그린 무근성 지도(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 제작. 2015년). (사진=고봉수 제공)
기억으로 그린 무근성 지도(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 제작. 2015년). (사진=고봉수 제공)

주민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무근성 마을 지도를 보면 용천수인 질아랫물의 위치가 각각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무근성 마을회에서 제작한 마을 소개 자료에는 질아랫물과 기러기물이 같은 용천수로 설명되고 있고,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질아랫물과 기러기물이 각기 다른 용천수로 표시되어 있다. 

무근성 마을회 제작 지도(2018년). (사진=고봉수 제공)
무근성 마을회 제작 지도(2018년). (사진=고봉수 제공)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각각 달라서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인터뷰와 사료들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필요가 있다. 개발로 훼손된 마을 용천수에 대한 자료정리와 함께….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서탑과 동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서탑과 동탑 아래에 마을이 있어 탑바래(탑알)라 불렀고 지금은 탑동이라 부른다. 1960~1970년대 무근성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공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아는 지명을 찾아보시라. 몇 군데나 기억하고 있는지?

탐라시대 고성 터. (사진=고봉수 제공)
탐라시대 고성 터. (사진=고봉수 제공)

피난민촌이 있었던 동쪽에는 탐라 시대 고성 터의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탐라 시대의 성터. 탐라지 고적조 등 옛 기록에 ‘주성 서북쪽에 옛 성터가 남아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일대가 조선 시대 이전의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곳이 탐라국의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동네를 ‘묵은성(오래된 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탐라국은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을 때 적대국 중 4번째에 속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다. 탐라국은 고려 태조 때 병합되어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하였고, 고종 때 ‘탐라(섬나라)’라는 명칭이 ‘제주(물 건너에 있는 큰 고을)’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탐라국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980년대 초까지 활발했던 마을의 생기도 느낄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해상왕국이었던 탐라국의 이야기가 무근성에 녹아들 방안이 필요하다. 

옛 한일소주(지금의 한라산) 공장. (사진=고봉수 제공)
옛 한일소주(지금의 한라산) 공장. (사진=고봉수 제공)

고성 터 표지석 북동쪽으로 가면 1950년 전쟁 중에 설립된 호남양조장 터가 있다. 양조장은 그 후 1955년에는 한일양조장으로, 1976년에는 ㈜한일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1986년 한림읍으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운영되었다. 소주의 이름은 1993년 ‘한일’에서 ‘한라산’으로 바뀌었고, 1999년에는 상호도 ㈜한라산으로 변경되었다.

1970년대 소주 업체들의 과당경쟁으로 정부는 하나의 도에 하나의 소주 회사만 배급할 수 있는 1도 1사의 원칙을 정하였지만 1988년에 이 원칙은 폐지되었다. 그런데도 도민들은 애향심인지, 길들어진 취향인지 모르겠으나 한일소주를 유독 선호했다. 청년 시절 애주가였던 나와 친구들은 한 사람당 각 1병의 한일소주를 기본으로 주문하고 음주를 시작했다. 

한일소주. (사진=고봉수 제공)
한일소주. (사진=고봉수 제공)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심정으로 소주 몇 병을 마실 수 있는지가 아니라 술자리를 몇 시까지 할 수 있는가로 주량을 과시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빠가 새벽 시간에 들어오는 줄 알았다는 성인이 된 두 딸의 이야기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한라산 소주는 천연암반수를 해저 80m 아래에서 뽑아 올려 화학 처리를 거치지 않고 자연수 상태로 사용한다. 소주의 맛은 물이 결정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다양한 소주들 이 진입한 현재까지도 제주도에서 한라산 소주는 시장점유율 60% 정도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소주이다.

한일소주 공장에서 탑동 쪽으로 내려오면 오리엔탈 호텔 남쪽에 면한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를 ‘촌물길’이라고 했었다. 파도가 치면 짠물이 올라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근처에 살던 친구의 말을 빌리면 태풍이 오는 날 마당에 냄비를 놓고 학교 갔다 오면 우럭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정도로 바다와 가까웠다는 이야기겠지?’라고 물으면 사실이라고 지금도 우긴다. 살았던 녀석의 이야기라 이길 수가 없다.

적산가옥(왼쪽)과 말고삐 묶는 돌(오른쪽). (사진=고봉수 제공)
적산가옥(왼쪽)과 말고삐 묶는 돌(오른쪽). (사진=고봉수 제공)

‘촌물길’ 서쪽 올레 17코스에 정원이 예쁜 적산가옥을 볼 수 있다. 정면에 복도가 있고 내부에 화장실이 있는 게 특징이다. 이 가옥은 ‘부동산 정보 통합열람’에 1927년 8월 27일이 허가 일자로 기록되어있다. 무려 90년이 넘게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집과 인연을 맺었을까? 이 집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그리고 주택으로 현재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보수 작업이 이루어졌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현재의 건물주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정원이 잘 단장된 것을 보면 집에 대한 애착이 크고 손재주가 좋은 분일 것이다.

적산가옥에서 탑동 쪽으로 내려오면 ‘벌랑길’과 만나는 교차로 구석에 수상한 돌 하나가 서 있다. 말고삐를 묶는 데 사용된 돌이다. 조선 시대 무근성에는 많은 사람이 말을 타고 다녔을 것 같은데 말고삐 묶는 돌은 현재 이것만 남아있다. 

남아있는 돌 하나로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돌 상태를 보면 바닥과 일체로 돼 있지 않다. 개발로 훼손될 뻔한 걸 누군가가 옮겨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역할을 하신 분의 안목에 감사한 마음이다.

‘말고삐 묶는 돌’을 지나 다시 탑동으로 향하다 서쪽으로 길을 틀면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맞은편에 제주 초가가 원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남아있다. 초가에는 현재 사람도 살고 있다. 이 초가의 허가 일자는 1927년 8월 2일이다. ‘부동산 정보 통합열람’에 기재된 내용에 대한 의문점은 있지만, 여하튼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던 초가는 분명한 것 같다.

이 초가는 1970년대 후반 탑동 1차 매립 전 바다에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원도심 안내를 할 때면 ‘바당에 붙은 집’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초가나 돌담이 어린 시절 보았던 것과 변함이 없다. 특히 돌담에 사용된 제주석 중에는 매립 전 앞바다에 가득했던 먹돌도 보인다. 

이 초가가 남아있어 매립 전 제주 섬의 경계를 알 수 있고 그 앞에 펼쳐졌던 먹돌새기 해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해안가에 먹돌이 많은 지역을 ‘먹돌새기’라고 불렀는데 탑동 먹돌새기 해변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 다음에 따로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바당에 붙은 집. (사진=고봉수 제공)
바당에 붙은 집. (사진=고봉수 제공)

아내와 함께 마실을 나와 무근성 길을 걸을 때면, 아내는 이 집은 누구네 집이고 저 집은 누구네 집이라며 추억의 지도를 꺼낸다. 지금은 소방도로의 개설로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올레도 많이 사라졌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좁은 올레를 마주치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죽은 말타기, 생 말타기, 자치기, 구슬치기, 해 떨어질 때까지 정신없이 놀다 보면 어느 집에선가 ‘OO야 밥 먹으라’ 하며 부르던 소리, 겨울철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날 정도로 뛰놀던 모습들…. 무엇을 하고 놀아도 재미있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한 모습들을 추억해 본다.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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