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를 푹 물러지게 삶아 거른 뒤 꿀과 생강즙으로 끓인 청량죽. 정조지에 소개됐다. (사진=김은영 제공)
조를 푹 물러지게 삶아 거른 뒤 꿀과 생강즙으로 끓인 청량죽. 정조지에 소개됐다. (사진=김은영 제공)

제주는 돌 위에 흙이 쌓인 섬인데, 흙이 얇기도 해, 바람불면 곡식이 쉽게 넘어지고, 비가 오면 휩쓸리기 일쑤, 해가 너무 오래나면 돌밭에서 곡식이 말라붙기 십상이다. 섬에 밭쌀을 키울 수 있는 땅도 귀하지만, 우리집은 그 마저도 없으니 장만해둔  쌀은커녕 보리도 메밀도 바닥이 났다. 

한움큼 남은 좁쌀이 떨어지기 전에 환상 곡식을 얻으러 창(倉:관덕정 서편 옛 시청자리)에 간다. 창뒷골(현재 주차장 주변에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에 다다르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줄을 섰다. 목사와 현감은 한양에서 내려와 녹봉을 받지만 그 아래 향리들에게는 정해진 급여가 없고 자기들이 맡은 관청 관련 일들로 이익을 얻으며 사는데, 유세가 대단하다. 

관가창고에 쌓여 있는 좀 먹은 곡식을 갖다 먹으라 하고 두 배 가까이로 되받으니 그 이자놀이가 좋다고 소문은 들었다. 우리야 그런 자리에 오를 일이 만무, 가을에 두 배로 되갚을 일이 막막하지만 배 곯을 순 없어 환상보리 한 되 얻는다. 

받아 온 한 되의 보리를 맷돌에 갈아 ㄱ·ㄴㅆ·ㄹ을 만들어 밥을 지어야 그나마 양이 불테니 맷돌을 꺼내 놓지만, 많지도 않은 보리쌀을 갈아내느라 족박만 들락날락 바쁘고 맷돌 돌아가는 소리만 앙작벌작 요란하다. 

지붕이 삭아서 별이 올려다 보이는 집안에서, 갈아 놓은 쌀로 밥을 해놓고 보니, 턱 없이 적어 나 한 숟갈, 어멍 한 숟갈, 아들 한 숟갈, 며느리 한 숟갈 나눠 먹는데, 한 되라던 쌀이 이렇게 작다니! 배가 고파 화가 나 부인을 때리고 말았다. 맞은 부인이 화가 나서 옆에 있는 아들을 때렸다. 아들은 또 화가 나서 자기 부인을 때린다. 며느리는 화가 나서 개를 때렸다. 

개도 화가 나서 고양일 물었다. 고양이도 화가 나서 쥐를 물었는데, 쥐가 내빼다가 그만  좁쌀 바구니를 엎어 버렸다. 그래서 아끼느라 모셔둔 좁쌀은 다 닭 뱃속으로 닭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정말 우리 빌보는 집에 먹을 것이 없다. 다들 배가 고팠으니, 누구를 원망하면 좋을 일인가!

옛날 뒷날(제주민요)

옛날뒷날

환상보리ㅎㆍㄴ 되 타단

앙작ㄱㆍ레에

벌작노래에

ㄷㆍㄹ음ㄷㆍㄷ은족박에

빌보는집에

멍먹ㄱㆍㄹ안

밥을허난

족으난

아방ㅎㆍㄴ적

어멍ㅎㆍㄴ적

아덜ㅎㆍㄴ적

메누리ㅎㆍㄴ적

아방은족으난

어멍을ㄸㆍ리난

어멍은용심나난

아덜을ㄸㆍ리난

아덜은용심나난

지각실ㄸㆍ리난

지각신용심나난

갤ㄸㆍ리난

갠용심나난

고낭일무난

고낭인용심나난

중일무난

중인용심나난

조쿠덕을솓아부난

ㄷㆍㄱ베소곱에ㄷㆍㄱ베소곱에

경허더라헙니다

삶은 좁쌀을 이용한 디저트 아이스크림. (사진=김은영 제공)
삶은 좁쌀을 이용한 디저트 아이스크림. (사진=김은영 제공)

제주에 전해지고 있는 전래동요 <옛날뒷날>의 가사를 화자의 입장에서 풀어 보았다.

환상은 환곡(還穀)의 다른 말로, 오래 저장하고 있는 군사미의 감소를 막고, 그것을 이용해 춘궁기인 봄에 굶주린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기인 가을에 빌려간 원곡에 이자를 붙여서 거두는 진휼책의 하나였다. 지방 관청에서는 이런 사창(社倉)을 두고 환곡사업을 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원곡의 1/10(쌀 1石당 1.5斗)에 해당하는 이자로 원곡이 줄어드는 것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환수하였다. 그러던 것이 각 기관마다 재정 확보를 위해 가져다 쓰는 바람에 환곡의 총량이 늘게 되서, 그것을 갚아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곡식이 재정이익을 늘여주는 종자돈이 되자 결국 지방의 관리들이 이것을 가지고 고리 대금업을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빌린 곡식에 대해 이자로 갚아야 하는 곡식이 원곡의 5/10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곡식을 빌리는 백성들이, 빌린 것 보다 더 많은 양의 햇곡식으로 되갚아야 하는 추수시기에도 제 날짜에 못 갚게 되면 그 날짜만큼 돈으로 환산해 받아내니, 곡식 빚에다가 돈까지 이중으로 빚을 얻게 하는  여러가지 폐단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너무 힘들거나 슬프면 웃음이 된다던가? 환상보리 한 되를 얻어다 먹어야 했던 가난한 삶을 그려낸 노래의 노랫말도 참 우습지만 가락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이런 노래는 저 가족으로 부터 나왔기를 빈다. 가난도 억울한데, 저런 해학마저 스스로 나올 수 없었다면 정말 삶이 억울할 것 같다.

이 웃픈 상황에 등장해 닭의 배를 불린 좁쌀은 제주의 주식이었다. 조는 달콤한 맛과 의외로 잘 어울린다. 잘 씻은 조에 물을 많이 잡아넣고 푹 물러지게 삶아 거른 뒤 꿀과 생강즙으로 맛을 내 끓이는 청량죽이 정조지에 소개 되어 있다. 훌륭한 식전 음식이 된다. 그렇게 삶은 좁쌀을 디저트 아이스크림에 써 보았다.

김은영 요리연구가(가운데).
김은영 요리연구가(가운데).

우리는 현재에 산다. 과거에서 발원해 끊임없이 흐르며 미래를 향한다. 잊혀져 가는 일만 가능한 흐름 속에서 음식도 그렇다. 냄비 안에서는 늘 퓨전이 일어난다. 잊어버린 현재의 것들을 통해 현재 음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도 의미있겠다. 최근 출간된 서유구 선생의 <임원16지> 중 '정조지'에 수록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맛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오래된 미래의 맛을 통해서. 

김은영 요리연구가.

코삿헌 음식연구소 운영. 뉴욕 자연주의 요리학교 NGI 내츄럴고메 인스티튜드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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