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하지만 가끔 나의 존재는 일상에서 지워진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 ‘국민’재난지원금 등의 사회서비스의 경우,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제공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국민에게만 적용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된 외국인 많고 ‘국민’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 하지만 이러한 제도의 이름에도 잘 드러나듯 ‘국민중심’, ‘국민이 먼저다’라는 ‘국민우월주의’식의 인종주의적 가치가 사회서비스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그래서 비국민이 하는 기여 혹은 그들이 내는 세금은 국민우월주의적인 인식과 행정 패러다임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바로 눈앞에 숨 쉬고 살아있는 누군가가 존재하지만 습관적으로 당연하다는 듯 구조에서 누락되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있지만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일상에서 겪는 ‘먼지차별’(micro+aggression의 합성어로, 아주 작은 공격, 미세하지만 공격적인 차별을 뜻하다)은 연대의 자리에서도 예외 없이 겪게 된다. 몇 달 전에 제주에서 미얀마와의 연대를 위한 자리에 토론자로 초대받은 적이 있다. 오가는 대화 속에 어느 토론자분이 “밖에 있는 사람이 연대한다 하더라도 이 싸움에는 결국 자국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들(자국민?)이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미얀마 상황을 발제해 주는 미얀마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 한 마디로 함께 앉아있던 나는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는 사회를 상상할 때 자동적으로 국민이 사는 국가(혹 민족이 사는 조국?)로 연결되어 “표준화된 정체성의 이미지”로 혹 “표준화된 인간상”으로 국민중심의 세상이 그려질 때, 표준화되지 않은 자들은 주변화 되고 사라지게 된다.
 
“결국 자국민이 필요한 싸움”에서 과연 내가 연대할 자리를 찾을 수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당사자임을 발견해 나가는 여정을 연대라고 표현한다면, 그렇게 연대의 여정을 떠나온 나는 투명해진 타자가 되어버림으로써 갑자기 도착할 곳을 잃은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경험을 수없이 겪게 된다. 몇 년 전에 일어난 촛불혁명은 ‘국민의 승리’이고 ‘대한민국주권의 실현’이라고 말하던 이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도 촛불을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국민이 아닌 존재들은 왜 죄다 지워지는 걸까? 그렇게 열심히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인권 실현에 큰 걸림돌이 되는 국민주권에 집착하는지 답답함 마음이 들었다.

‘촛불시민은 곧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인간상을 그리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구조에서는 국민이 아닌 사회구성원의 목소리가 비집고 나올 틈이 없다. (특히 ‘체류’에 따른 제한적 표현의 자유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주권을 실현한다는 담백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예 모르거나 혹은 애매모호한 개념으로만 알고 있어서, 그 막연함 때문에 열정적으로 외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국민국가의 틀에서 인권의 구현은 국가주권을 통해서 국민기본권의 형태로만 구현되어 왔기 때문에 주권과 인권을 동일화하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인권의 특권화라고 봐야 하는 국민기본권은 주권과 인권의 간격을 말해주는 권리다.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주권의 핵심은 합리적 근거 없이 차별할 권리와 전쟁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의 실체는 인종차별주의자와 그 예비군이다. 합리적 근거 없이 차별할 권리와 전쟁할 권리를 권리라고 입에 올리기 부끄럽다면 더 이상 국민주권을 당당하게 주장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있지만 없어져 버린 순간들. 이 모든 찰나를 다 나를 향한 아주 작은 공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작은 공격들이 끊임없이 내 몸을 향해 퍼부어지는 장면을 상상하면, 내 몸은 곧 전쟁터가 되고, 분단선이 된다. 휴전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몸이 알려준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전쟁을 끝낼 마음이 없거나, 끝낼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체류자’가 어떤 표현을 할 때 뿌리를 뽑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이 아닌 자가 든 촛불은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닌, 내정간섭이나 주권침해라고 간주된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민의 인권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어느 정도까지 차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주제가 되어왔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권보다 국민주권이 신장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세계인권선언문의 탄생배경을 공부해 보면, 인류는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인권침해와 전쟁행위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권의 보편적 존중과 증진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적어도 70여 년 전부터 인권의 실현은 평화의 전제조건이라는 인식이 공유되었는데, 이는 주권의 절대성이 흔들리고 인권의 중요성이 부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에서 작지만 해로운 ‘먼지차별’에서 전쟁까지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차별 없는 세상과 전쟁을 끝내는 세상에 다가가기 위해 차별금지법제정에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대한민국 헌법 제6조(①헌법에 의하여 체결ㆍ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②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의 적극적인 구현을 통해 이 사회의 헌법을 ‘평화헌법화’하는 운동을 해 나가면 좋겠다. 

‘평화헌법’이라는 발상이 ‘전쟁포기’라는 말만 가지고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몸과 전쟁의 연속성을 되찾으면 전쟁의 반댓말은 평화라기보다 모두를 향한 평등한 환대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평화헌법화’라는 발상이 몸의 실감으로 구체화되어가기를 바란다. 그런 실천을 통해서만 어느 누구도 일상의 작은 공격으로 사라지지 않고, 전쟁으로 생명을 잃지 않은 세상이 다가오는 것 아닐까.

에밀리
에밀리

글쓴이 에밀리는 대만 출신이다. 제주에서 정착하기 전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랬고, 지금 제주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제주에서 아이를 낳았다. 육아에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다 쏟아붓는 일상 속에서 제주의 '인간풍경'을 글에 담고자 한다. 이 땅의 다양성을 더 찬란하게, 당당하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달 마지막 주말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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