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기억이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는 제주의 모습을 빠르게 지워하고 있다. 제주투데이는 계간 <제주작가> 2021년 가을호가 마련한 '잊혀진 장소의 정치학' 특집 기사를 편집진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다. 이 글들이 제주의 장소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편집자 주>

 

1. 상실의 비명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오래 전 그곳은 해가 뜨면 바다가 먼저 일어났고 달이 뜨면 하루가 어둠으로 번져갔다. 용암처럼 뜨거웠던 바위가 파도를 만나 식어갔던 시간들도 있었다. 땅이 있어 엎드려 오늘의 양식을 구했다. 바다가 있어 자맥질하며 내일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어제와 오늘의 시간들은 바람에 실려 파도가 되었다. 하루의 땀이 내일의 양식으로 익어갔다. 파도가 끝내 닿은 곳이 땅이었고 땅이 차마 가지 못한 곳이 바다였다. 노을을 배경으로 저물어가는 풍경은 시간으로 익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삶의 돌담을 쌓아갔다.

그러나 이제는 엎드려 땀 흘릴 땅도, 자맥질하며 건져 올릴 바다도 사라지고 있다. 파헤쳐진 땅에는 빌딩들이, 숨비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독한 배설의 악취만 가득하다. 비행기는 꼬리를 물고 섬 땅을 점령하듯 들이닥치고, 관광객들은 매끈한 유리창 안에서 섬을 즐기고 있다.

먹고, 자고, 내지르는 환호성이 이 땅에 새겨진 시간을 생각할 리 만무하다. 생각이 사라진 자리마다 폐허다. 어제만 하더라도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었던 기억들은 사라졌다.

당신이 저물녘 바라본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면…,

그것은 사라져버린 기억들이 비명을 지르며 침몰하기 때문이리라.

장소는 기억이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당신이 저물녘 바라본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면…,그것은 사라져버린 기억들이 비명을 지르며 침몰하기 때문이다. 사진=김동현
장소는 기억이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당신이 저물녘 바라본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면… 그것은 사라져버린 기억들이 비명을 지르며 침몰하기 때문이다. 사진=김동현

베릿내, 흘캐, 몰래물, 당동산, 구럼비. 입에서 맴돌고 기억으로 지켜가던 이름들은 지워졌다. 이름이 지워지자 장소가 사라졌고 기억도 사라졌다. 살아서 빛나던 것들이 사라진 자리마다, 상처다. 제주 땅 곳곳 상실의 비명이 처연하다.

2.  식민화된 지역의 현재

장소의 실종은 한 지역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을 초월한 문제이며 세계가 오래전부터 직면해 온 현상이기도 하다. 15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유럽 제국주의 팽창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성을 식민지에 이식했다. 이른바 ‘신세계의 발견’으로 명명된 제국 지리의 확장은 타자화된 식민지를 ‘발명’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아메리카 ‘정복’은 지구적 근대화의 출발이었다. 그것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발명’함으로써 타자를 ‘은폐’하는 폭력적 호명이었다.

폭력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노골적인 폭력의 시대가 지나자 폭력은 폭력(성)을 스스로 은폐하고 때로는 심미적 가치로 위장했다. 정치적, 경제적인 억압의 자리를 세련된 수사가 대신했다. ‘제국의 종언’이 아니라 ‘제국의 변주’가 들려주는 교향악은 피하기 힘든 매혹이었다. 문명이라는 이름과, 발전과 성장이라는 구호는, 자발적 복종을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유혹이었다. 제국의 지식장 안에서 근대는 여전한 칭송의 대상이었다. 혼돈과 낯섦으로 충만했던 땅들은 매끈한 근대의 대지로 뒤덮여 버렸다. 근대라는 ‘상상’ 앞에서 지역의 시간들은 버려져야 하는 낡은 유습(謬習)이었다. 그것은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기꺼이 예속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적 예속’이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그 모든 시간이 끝내 도달한 궁극의 예속일 것이다. ‘궁극의 예속’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대(성) 자체를 회의해야 한다. 악무한의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 대안적 세계화를 말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식민성이 내재되어있음을 지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근대(성)에 대한 신념은 무한한 사회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주의적 팽창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식민화를 수반한다.

제주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드림타워'가 들어섰다. 그들의 꿈은 과연 누구의 꿈인가.. 사진=김동현
제주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드림타워'가 들어섰다. 그들의 꿈은 과연 누구의 꿈인가.. 사진=김동현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19세기 유럽 문화에 은폐되어 있는 제국주의의 억압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그는 제국의 본질을 지리적 영토에 대한 지배로 규정하면서 ‘제국주의의 종언’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억압과 팽창의 이데올로기를 읽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제국의 편견과 피식민자들의 자발적 순종의 과정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는 그의 주된 관심은 ‘문화적 양식’에 은폐된 정치의 민낯이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장소의 식민화, 달리 말하자면 장소성을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전유한 폭력적인 재편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지리적 공간의 재편성은 역설적으로 탈식민적 사유의 출발이다. 신자유주의적 지식의 장에서 로컬은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해석 가능하고, 재현 가능하며 매끈한, 자본의 공간이 되어야만 했다. 울퉁불퉁하고 거칠고, 낯선 장소들은 해체되었고 새롭게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공간의 세련된 이식이었고 위장된 지배 전략이었다. 프란츠 파농이 제국주의 통치 전략을 거론하면서 “식민지 민중에게 가장 구체적인 가치는 대지”라고 말한 이유도 이러한 식민화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을 염두에 둔 이들의 인식을 염두에 둔다면 식민화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타 민족 사이에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성장주의를 우선한 국가-자본의 결탁은 그 자체로 중심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이식하는 과정이었다.

눈을 제주로 돌려보자. 1960년대 이후 시작된 제주 개발은 반공국가의 자본주의적 기획이었다. ‘낙토건설’과 ‘복지제주’가 개발의 명분이었다. ‘하와이’와 ‘버뮤다 섬’은 관광 제주의 롤 모델이었다. ‘제2의 하와이’라는 용어는 60년대 이후부터 오랫동안 근대적 발전을 옹호하는 징후적 기표였다. 5·16 쿠데타 직후 제주도지사로 임명된 김영관은 ‘관광제주 개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제주도와 많이 닮았다고 알려진 ‘하와이’는 오늘날 연간 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1억불 이상의 관광 불(弗)을 얻고 있지만 현재의 7천500여 개의 객실이 부족하여 앞으로 1만 개의 객실을 더 증축하고 1970년도에는 4억불 이상의 관광 불(弗)을 목표로 하는 관광개발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또 면적 54만 평방미터에 인구 3만6천밖에 되지 않는 ‘버뮤다’도는 상류 하천도 없고 지하수도 없는 조그만 산호도이지만 연간 14만 여의 관광객이 쇄도하여 3천여 불의 관광 불(弗)을 얻고 있다고 한다.

5·16 이후 제주도는 급 기타(及其他) 장래를 촉망받는 섬으로 전국민의 시청(視聽)에 압도되고 있다. 지난 13년 동안 구 정부로부터 서자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도민들의 안전에서 지금 혁명정부의 과감한 손이 그동안 파묻혀 있던 숱한 비밀을 발굴해 가고 있다. 실로 지금 제주도민들은 일찍이 없던 열망의 눈초리를 혁명정부의 과업에 모으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 오랜 꿈의 실현을 위하여 ‘낙토제주’ 개발의 대명제 앞에 손발을 걷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개발 모델로 하와이와 버뮤다 섬을 제시하고 있고, 이승만 정부 시절 “서자의 버림”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 대목은 이후 제주 개발 담론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제주 개발은 1963년 제주도를 자유 지역으로 설정하자는 구상이 제기되고 이후 제주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길의 혁명’, ‘물의 혁명’은 5·16도로 개설과 어승생 수원지 건설의 성과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수사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이라는 단어가 ‘5·16혁명’에서 기원했음은 간과하기 쉽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 개발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은 이제 정설이 되었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로스토의 제3세계 근대화론을 군부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추진되었다.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절멸에 가까운 대학살을 경험한 제주 도민들에게 ‘재건’은 생존의 과제이기도 했다. 근대화에 대한 내부적 열망과 국가 주도의 기획은 때로는 공명하고 때로는 불협화음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박정희 식 개발의 성공적 사례로 인식되고 있는 5·16도로와 어승생 수원지는 ‘국토건설단’의 강제 노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주 개발 초창기부터 건설 관련 부서에 근무했던 김중근이 펴낸 『제주건설사(도로·교량·교통)』에는 부록으로 ‘제주도와 박정희 대통령(1961~1978년)’이 실려있다. 재임 기간 박정희가 25차례나 제주를 방문했고 제주 개발과 관련한 지시를 정리한 이 부록이 말해주는 것처럼 박정희는 제주 개발의 ‘창안자’이자 ‘설계자’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일주도로 개설 과정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거론하고 있다. ‘자발적 동원’으로 포장되었지만 당시 국가의 강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1968년 국토건설단이 제주에 도착했을 때 당시 신문은  “국토 건설하는 힘센 주먹”이라고 우호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은 열악한 시설과 강압적 동원에 불만을 품고 수용시설을 탈주하기도 했다. 이들의 탈주는 정일권 국무총리가 특별지시를 할 정도로 정권차원의 문제였다. 일주도로 개설 노동에 동원된 주민들의 노력이 과연 “눈물 겨울 정도”의 헌신이었는지 따져봐야 할 문제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손”으로 제주의 “숱한 비밀을 발굴”하는 과정이 개발이라면, 그것은 개발의 주체가 지역이 아니라, 국가의 기획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대상화가 통치를 위한 (무)의식적인 기술이라는 점은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롯한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근대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개발 주체에 대한 논쟁이 초기부터 일었던 이유는 그것이 국가 통치 기획을 전면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로컬의 가치를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민 주체 개발 논쟁이 개발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개발로 상징되는 근대화는 여전히 성취해야할 과제로 인식되었다. 그야말로 ‘개발 붐’이 일었던 1960년대는 역설적으로 로컬에 대한 사유가 본격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1962년 제주도문화상이 제정되고, 1964년에는 제주도민속학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제주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환경과 민속의 중요성을 탐구했던 1960년대 제주 지식인들 역시 ‘개발만 하면 제2의 하와이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한라산을 200여 차례나 올랐던 부종휴와 1세대 제주민속학자인 진성기조차도 적극적으로 근대적 개발에 호응했다. ‘재건’이 지상과제였던 시대였기에 로컬의 가치를 우위에 두었던 그들조차도 시대에 긴박된 존재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시대가 그랬기 때문이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응시해야만 한다. 그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응시할 때만이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3. 이제, 다시, 회오리 속으로

경관이 질서이고 권력이다. 애월읍 한담의 사례는 경관을 지배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간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지역의 장소들은 해체된다. 장소의 실종은 기억의 부재를 낳는다. 기억이 없는 땅은 더 이상 우리의 터전이 아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대상화하고, 신비화하고, 지배한다. 1961년 5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제주도지사를 지냈던 해군 장성 출신 김영관은 지금도 제주 개발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2017년 제주대학교는 김영관 지사가 제주발전에 영향을 끼쳐 후학에게 리더의 표상이 되었다면서 명예 행정학 박사를 수여했다. 그의 나이 91세의 일이었다. 노구의 퇴역 장성이자, 관료가 근엄한 표정으로 박사 가운을 입은 모습은 현재도 여전한 ‘개발 담론’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정해군기지에 들어선 김영관복합문화센터. 해군 준장 출신이었던 김영관은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다. 아직도 그를 '제주개발의 선구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군도 이러한 인연을 기려 '김영관복합문화센터'를 건립했다. 하지만 그것이 강정의 기억을 단단한 콘크리트로 뒤덮어 버린 '기억의 말살'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진=제주민군복합미항 홈페이지
강정해군기지에 들어선 김영관복합문화센터. 해군 준장 출신이었던 김영관은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다. 아직도 그를 '제주개발의 선구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군도 이러한 인연을 기려 '김영관복합문화센터'를 건립했다. 하지만 그것이 강정의 기억을 단단한 콘크리트로 뒤덮어 버린 '기억의 말살'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진=제주민군복합미항 홈페이지

2016년 10년 가까운 싸움 끝에 준공된 강정해군지에는 ‘김영관 복합문화센터’가 있다. 해군은 김영관복합문화센터가 ‘주민과 장병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시설로 해군 출신인 그의 제주 개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설명한다. 구럼비가 사라진 자리, 싸움이 여전한 그곳에 세워진 김영관 복합문화센터는 장소의 상실과 그것의 폭력적 재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름을 명명하는 자가 권력이다. 단단하게 다져진 도로들은 장소를 지우고, 기억을 짓밟는다. 기억이 사라진 곳마다 탐욕의 빌딩이 높다. 날카로운 유리창 사이로 바람은 끝내 찢어져 운다. 크고 높은 비명처럼 운다. 울음으로 쓴다. 울음으로 산다. 울어서 끝내 살고, 울어서 끝내 살아간다. 잊지 않기 위해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겨우 살고, 겨우 싸운다. 겨우의 힘으로, 그러나 끝내 지치지 않는 팽이처럼, 돈다, 돈다. 그 마땅한 회오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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