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고요 속 백록의 자태 

지나던 길에 눈인사를 하지만 일주일 내내 가을비 소식에 

짧은 만남은 긴 여운을 남기며 영실로 향한다.

[백록]

굽이굽이 경사가 심한 길 따라 주차장에 도착하면 

한라산 정상의 남서쪽 산허리에 탐방로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영실(靈室)' 

'오백나한', 또는 '오백장군'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실기암과 

한라산 최고의 단풍을 자랑하는 영실 계곡  

일찍 가을을 만나러 간다.

[영실 소나무 숲]

영실(靈室) 소나무 숲은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소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해발 900~1,300m 정도에서 자란다.

제주의 바닷가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흑갈색 나무껍질과 백색의 겨울눈을 하고 있는 곰솔과 다르게 

나무껍질이 얇고 붉으며, 겨울눈 또한 붉은색을 띤다.

소나무 숲의 상쾌한 아침 공기 

콸콸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힘차게 떨어지는 나지막한 폭포 

자연이 주는 벅찬 감동과 소확행을 누리는 동안 오르막이 시작된다.

가파른 산길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힘이 부칠 때쯤 반겨주는 '제주황기' 

그리고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한라돌쩌귀' 

와우~ 반갑다!

[한라돌쩌귀]
[제주황기]
[영실기암과 병풍바위]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고 

수직의 바위들이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처럼 둘려져 있는 '병풍바위' 

신들의 거처, 구름은 걷힐 듯 잡힐 듯 힘겨루기를 한다.

병풍바위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에 숨을 고르며 자연스레 가던 길을 멈춘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
[오름 풍경]
[생각에 잠긴 까마귀]

오르는 내내 봄과 여름을 아름답게 빛냈던 한라산의 나무들은

흔적들을 남겨 한 발짝 그냥 스치기엔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날아가던 까마귀도 잠시 쉬어가고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동안 열두 폭 병풍을 만들었다.

[주목 군락지]
[주목]
[참빗살나무]
[산딸나무]
[화살나무]
[노린재나무]
[마가목]
[섬매발톱나무]
[병꽃나무]
[사스래나무]

수피가 하얗게 벗겨진 기형의 '사스래나무' 

영실 혼효림을 대표하는 중요한 나무이기도 하다.

[구상나무와 사스래나무]

탁 트인 계단을 오르고 나면 

그늘진 숲터널이 반갑게 맞아준다.

울퉁불퉁하던 돌길은 걷기가 한결 수월한 데크길로 만들었고 

숲은 언제나 편안하고 포근함을 안겨준다.

[백록담 화구벽]

가을 산행의 또 다른 매력 

사방이 탁 트인 끝이 보이지 않는 활주로 끝에는 

백록담 화구벽을 중심으로 오름 군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눈에 들어오는 선작지왓의 넓은 고원 초원지대 

봄에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꽃바다를 이루는 산상의 정원에는

초록의 제주조릿대와 노랗게 물들어가는 호장근이 자람터가 되었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고원 초원지대의 '작은 돌이 서 있는 밭'이라는 의미를 지닌 곳으로 

키 작은 관목류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고원 습지로 

생태적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선작지왓 제주조릿대와 호장근]
[선작지왓 탐방로는 공사 중]
[짐을 내리는 헬기]
[만세동산이 보이는 길목]

이곳에도 제주조릿대와 호장근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백록담을 제외한 한라산 전역에 분포한 제주조릿대는 땅 속 줄기가 그물처럼 넓게 뻗어 있고,

마디 부분에서 매년 새순이 돋아나 군락을 이룬다.

조릿대 숲은 강풍, 강우, 폭설 등으로 인한 토양의 유실을 막아주고

야생동물들의 좋은 서식처가 되어준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케 하는 '구상나무']
[구상나무]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이란 구상나무'

늘 푸른 나무, 힘찬 기상을 가진 토종나무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로 한국 특산식물이다.

한라산은 지구 상에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구상나무의 자람터다.

백록담을 중심으로 해발 1,400m 고지 이상에서 겨울 혹독한 추위와 바람을 견디며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오랫동안 한라산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주인공이다.

[맷용담]

** 한라산 특산식물 

한라산 특산식물은 한라산을 포함해서 우리나라에만 분포한다.

이런 귀한 식물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지구 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일이다.

특히 한라산 1,400 고지 이상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세찬 비바람을 견디면서 '왜성화' 된 것이 특징이다.

[가는범꼬리]
[은분취]
[산여뀌]
[세뿔여뀌]
[미꾸리낚시]
[제주달구지풀]
[산부추]
[둥근이질폴]
[좀향유]
[바늘엉겅퀴와 박각시]
[바늘엉겅퀴와 왕나비]
[바위떡풀]
[산톱풀]
[흰진범]
[구슬붕이]
[만년석송]
[한라고들빼기]
[눈개쑥부쟁이]

한라산의 가을을 알리는 습지의 '물매화' 

추워지기 전에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며 고지대부터 가을은 시작되고 

들꽃들은 부지런히 계절을 전해주지만 한라산의 가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삐 지나간다.

[물매화]
[고원 습지]
[하늘을 담은 물웅덩이]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만세동산 전망대에서는 

운무가 깔려 시내는 훤히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지만 

민오름(민대가리동산)~장구목~백록담(화구벽)~윗세붉은오름~윗세누운오름 

서 있기만 해도 영화가 되는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름'은 제주어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작은 화산체를 말하는데 

제주에는 360여 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한라산천연보호구역 내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물장오리'를 포함하여 46개의 오름이 있다.

[삼형제오름~노로오름~바리메오름~쳇망오름~큰노꼬메~족은노꼬메~사제비동산]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다시 영실 방향으로...

1,100 고지 부근의 세오름 보다 위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윗세오름'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이웃한 윗세누운오름과

전망대가 있는 윗세족은오름이 다정한 형제처럼 보인다.

[곰취]
[윗세오름 대피소는 공사 중]

오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영실 

등반로를 따라 들어가면 아름다운 숲길과 

봄이면 산철쭉, 털진달래가 장관을 이루는 초원 

겨울에 눈부신 백설에 덮인 구상나무 군락지와 백록담 화구벽까지 

아름답게 펼쳐지는 한라산의 신비스러움은 감동을 전한다.

고은희

한라산, 마을길, 올레길, 해안길…. 제주에 숨겨진 아름다운 길에서 만난 작지만 이름모를 들꽃들. 고개를 숙이고 납작 엎드린 생명의 꽃들과 눈을 맞출 때 느껴지는 설렘은 진한 감동으로 남습니다. 조경기사로 때로는 농부, 환경감시원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평범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담고픈 제주를 사랑하는 토박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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