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위령비 뒷면엔 점 여섯 개가 새겨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위령비 뒷면엔 점 여섯 개가 새겨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1948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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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 마래산 끝자락에서 마치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곳.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만성리검은모래 해수욕장과 여수세계박람회장을 양 옆으로 두고 유난히 쓸쓸하게 서 있는 위령비가 있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올해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맞아 위령제와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을 찾았다. 제주4·3연구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등이 함께했다.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가장 처음으로 찾은 곳은 만흥동에 위치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지난 2009년 10월19일 여순사건 61주기에 맞춰 세워졌다. 널따란 비석 뒷면엔 두 개의 날짜와 6개의 점만 새겨져 있다. 분명 ‘희생자 위령비’인데 희생자의 영을 위로하는 글이 단 한 자도 없다. 

61년이라는 시간을 점 여섯 개로만 채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동포를 학살할 순 없다.”

1948년 5월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14연대가 여수에 창설된다. 이들에겐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여수항에서 출발해 제주로 출동하기로 한 같은 해 10월 19일, 14연대는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같은 민족을 죽일 수 없다는 게 항명의 이유였다.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14연대 주둔지를 방문했다. 길 건너편이 주둔지.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14연대 주둔지를 방문했다. 길 건너편이 주둔지. (사진=조수진 기자)

당시 제주지역은 전라도에 속해 있다가 1946년 분리돼 도(道)로 승격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사람은 전라도민이기도 했다. 

14연대는 다음 날인 10월 20일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거부한다”며 봉기의 이유를 밝혔다. 이후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지역을 장악, 화순·남원·하동 지역 일부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제거하라”

이에 현지 사령관이었던 김백일 제5여단 중령은 같은 달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 전역을 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에 계엄법이 만들어지기도 전이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모두 15개 연대였는데 7개 연대가 진압 작전에 투입됐으며 장갑차 부대와 항공대, 해군 함정이 동원됐다. 이들은 27일까지 전역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봉기군뿐만이 아니라 시민들 역시 무차별적인 공격의 대상이 됐다. 

지난 19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여순사건기념관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9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여순사건기념관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진압 과정은 물론이고 14연대가 해산하고 나서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동아일보>1948년 11월5일자)고 지시한다. 이듬해 전라남도 당국이 발표한 사망자 수만 1만1000여명이다. 

정부는 봉기군에 협력한 사람들을 색출하겠다며 제대로 된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학살을 자행했다. 진압군은 사람들에게 초등학교와 공설운동장으로 모이라고 명령하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끌고 왔다. 그중 한 곳이 여수경찰서와 가까웠던 종산국민학교(지금의 중앙초등학교)였다. 

지난 19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초등학교(옛 종산국민학교)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9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초등학교(옛 종산국민학교)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머리가 짧아서, 작업화를 신어서…처형

혐의자 심사방법으로는 흰색 일본식 작업화(지까다비)를 신거나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등도 기준에 포함됐다. 또 사람들이 지목하는 사람을 즉각 처형했다고 해서 ‘손가락총’이라는 표현도 생겨났다. 재판은 물론이고 별 다른 근거 없이 죽임을 당했다.

언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은 당시 상황을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리영희, <역정:나의 청년시대>, 창작과비평사, 1988)했다고 표현했다.   

지난 19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여순사건기념관을 찾았다. 사진은 '손가락총'을 형상화한 조형물.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9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여순사건기념관을 찾았다. 사진은 '손가락총'을 형상화한 조형물. (사진=조수진 기자)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됐던 125명이 총살 당한 곳이 희생자 위령비 인근에 있는 만성리 학살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경찰에 따르면 5명씩 총살한 뒤 시체를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았다고 한다. 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다고 한다.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유족들은 이곳에 합동묘를 만들어 ‘형제묘’라고 이름 붙였다. 함께 희생된 이들끼리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지내라는 뜻이다. 여기에 세워진 형제묘비 뒷면은 텅 비어있다. 원래는 형제묘가 만들어진 설명이 있었는데 새 판으로 덧대어진 것.

서희종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은 “원래는 비문이 있었다”며 “‘125명이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게 곧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낙인이 될까봐 유족이 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를 찾았다. 사진은 형제묘비 뒷면.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를 찾았다. 사진은 형제묘비 뒷면. (사진=조수진 기자)

피해자가 죄인이 되는 비극은 제주뿐만 아니라 여순에서도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 비극은 ‘희생자 위령비’ 뒷면의 점 여섯 개와도 연결된다.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질 예정이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시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발발하여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를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지역 일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학살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분단과 갈등, 혼란의 시대에 억울하게 희생된 여순사건 영령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영면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위령비를 세운다.”

하지만 여수시에서 ‘학살’이라는 단어를 빼기를 요구했고 유족회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뒷면엔 ‘1948년 10월 19일’이라는 날짜 이후 아무런 말도 쓰이지 못하고 대신 말줄임표가 새겨졌다.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가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이를 두고 김진수 시인은 “이 여섯 점 침묵 속에 그들의 원혼과 유족들의 통한을 한 줄도 빠짐없이 모두 새겨넣었다”(<좌광우도> 중 ‘나말이어라’, 실천문학사)고 쓰고 있다. 여섯 개의 점은 ‘말할 수 없는 진실’ 그리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고 있었다. 

7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떤 묘비는 진실을 덧대어 가려야 하고 어떤 묘비는 말줄임표로 침묵 해야한다. 73년 전의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6월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오지 않았을 것만 같았던 그날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됐다. 덧댄 판을 걷어내고 말줄임표가 필요 없는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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