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탑동에서 바릇잡기를 하는 모습이다. 뒤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민둥산 사라봉이 보인다.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1960~70년대, 탑동에서 바릇잡기를 하는 모습이다. 뒤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민둥산 사라봉이 보인다.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초등학교 시절에는 탑동 바다를 앞바당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 물때를 맞춰 앞바당에 나가면 주전자 하나 가득 깅이(게), 보말(고동) 등을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먹을 게 흡족하지 않을 때라 깅이나 보말은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잘 삶은 보말을 옷핀이나 바늘, 이쑤시개를 이용해서 까 먹었다. 온 가족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누가 보말을 보말똥까지 꺼낼 수 있는지를 겨루기도 했었다. 그때는 깅이나 보말이 언제나 먹을 수 있었던 일반적인 간식이었는데….(지금은 보말칼국수가 9000원에서 1만원, 보말죽은 1만1000원에서 1만5000원 정도로 결코 싸지 않은 음식이다.)

한여름 탑동 앞바당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취학 전 어린 남자아이들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물놀이를 했었고, 여자아이들은 속옷 정도 입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조금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방과 후 바로 앞바당으로 달려가 물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물놀이를 하다 젖은 옷들은 벗어서 뜨거운 먹돌 위에 올려놓고 놀다 보면 금세 말랐다. 귀에 물이 차면 따뜻한 돌을 귀에 대어 물을 빼기도 했다. 
 
물놀이를 하다 보면 파도에 복 먹기가 일쑤였다. 복 먹지 않으려고 물 밖으로 머리를 쳐들고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 이 모습이 개가 헤엄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개헤엄이라고 불렀다. 사촌 중에 체육학을 전공한 형이 있었다. 제주 출신으로 수영에 자신이 있었던 형이 수업 시간에 나름대로 멋지게 수영을 하고 있는데, 뒤에 있던 교수님이 큰 소리 “너 제주도 출신이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형은 머리를 항상 물 밖으로 내밀고 수영하는 제주도식 생존 수영인 개헤엄을 쳤던 것이다. 

그래! 우리는 파도와 맞서서 살아남기 위해 배운 수영이 아닌가….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탑동의 1970년대 후반의 모습이다.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탑동의 1970년대 후반의 모습이다.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사라봉의 우측면에는 제법 나무들이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70년대에 국가에서 벌인 식목일 식재 사업의 효과일 것이다. 탑동 1차 매립공사를 앞두고 학생들이 사라봉 ‘모충사’ 건립을 위해 동원되어 먹돌을 옮기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1920년대 후반, 일제는 산지항 건설을 위해 허물어 버린 제주성 성곽의 2/3를 바다 매립용 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70년대 후반에도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소중한 제주의 가치는 그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1976년 제주시는 탑동의 해일 피해를 방지하고 해안도로를 개설하여 임해 관광단지를 조성할 목적으로 탑동 매립계획을 수립했다, 탑동 제1차 매립은 1980년 5월에 완공되었다. 매립된 탑동에는 제주서울호텔과 오리엔탈호텔 등이 들어섰고 먹돌새기 해변은 훼손되어 버렸다.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탑아래 1차 매립.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1980년대 대학 시절에는 방학이 되면 친구들이 탑동에 모여들었다. 탑동 바다에서는 사나운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힘이 넘치는 바다였다. 아내와 연애 중이던 대학 시절, 추석 연휴에 집에는 못 가고 바다는 보고 싶어서 인천 연안부두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실망감이 너무나 컸다. 고향 제주에서 보던 바다와는 다르게 활기 없고 죽어버린 모습의 바다였다. 그래서인지 집에만 오면 생동감 넘치는 바다를 만나러 자연스럽게 탑동으로 달려갔다. 

탑동에는 많은 추억이 있다. 그 시절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던 한 친구가 선배가 만든 노래라면서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들려줬다. 노래가 너무 좋아 따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 노래가 1983년도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에밀레의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였다. 물론 그 친구는 팀의 메인 보컬이었다. 탑동 방파제에서 부르던 곡을 편곡해서 참가했으니 그 원곡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내가 되는 셈이다.

친구들과 방파제 위에 걸터앉아 맥주병에 담긴 막걸리에 과자 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서로의 이야기를 풀곤 했다. 당시에는 쌀 막걸리가 아닌 밀 막걸리를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4홉짜리 맥주병에 막걸리를 담아서 판매했었다. 한 병에 5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은 한 친구가 과음하여 실수로 방파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옆에 있던 친구가 팔로 머리를 감싸고 같이 떨어져서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방파제의 높이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방파제 아랫부분은 바윗돌들이라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었다. 팔로 감싸준 그 친구는 지금도 자기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떨어졌던 친구는 기억을 못 한다. 술은 이런저런 변명거리의 1순위인 것 같다.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탑아래 2차 매립. (사진=제주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무근성, 그 오래된 미래' 중)

1982년에 제주시는 제2차 탑동 매립 기본계획안을 수립했다. 사업비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서 민간 참여를 결정하자, 제주시 소재 제주해양개발㈜과 광주시 소재 범양건영㈜이 공동으로 매립면허를 신청했다. 그리고 1986년 12월 24일에 매립면허가 발급되었다. 

국회는 공공성을 강화한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같은 해 12월 17일에 통과시켜 31일부터 적용할 예정이었다, 제주시는 법 발효 일주일 전에 구법에 따라 매립면허를 발급한 것이다. 그래서 정경유착의 결과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8년에 삼도동 해녀들은 “어민생계 보장하라”, “범양건영은 계약을 철저히 이행하라”면서 매립공사 현장사무소를 점거했다. 이 사건은 탑동 매립반대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제주대학교 학생들도 ‘제주대탑동불법매립공동대책위원회(제주대탑대위)’를 조직하여 매립면허 발급 과정의 불법성을 밝혀내고 폭로했다. 제주의 시민단체들 역시 매립면허 취소를 요구했으나, 당국은 민간사업자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1989년에는 ‘탑동불법개발이익환수투쟁도민대책위원회(탑대위)’가 결성되어 개발이익의 환원 및 매립 토지의 환원을 요구했지만, 제주시와 제주도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탑동에서 오라동 종합경기장에 이르는 병문천 2.3km 구간을 덮어 제주시에 기부하겠다는 사업자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탑동 동방파제. (사진=고봉수 제공)
탑동 동방파제. (사진=고봉수 제공)

그렇게 기부한 병문천 복개 사업은 이후 제주도 감사위원회의 감사 결과 부실 공사로 드러났고, 병문천은 태풍과 장마 때마다 대표적인 수해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준공된 탑동 매립지는 파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하부 기초부가 깎이고 파이는 세굴 현상과 여름철 태풍 시 월파 현상으로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인근 호텔 로비까지 해수가 유입되었다. 이에 탑동 매립지는 재해위험지구로 지정되었다. 안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립지 안쪽에 파도를 잠재우는 기능으로 1100m의 동방파제가 건립되었다. 탑동광장 일대 220m 구간에는 세굴 현상에 의한 기초부의 내구성 및 안전성 확보를 위한 시설이 보강되었다. 거기에다 ‘동방파제는 앞으로 계획 중인 제주 신항의 시설물로 활용될 것’이라는 제주도 관계자의 인터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1976년 탑동 지역의 해일 피해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시작된 매립공사는 결국 개발에 의한 또 다른 재해위험지구를 만들었다. 지금은 또 기존 탑동 매립지의 8배에 가까운 136만㎡를 메워 신항만을 계획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린 시절 마주했던 생동감 넘치는 파도의 모습은 이제 볼 수가 없고, 대학 시절 인천 연안부두에서 마주친 죽은 바다를 탑동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동 한두기와 서 한두기 사이에 쌓인 퇴적물. (사진=고봉수 제공)
동 한두기와 서 한두기 사이에 쌓인 퇴적물. (사진=고봉수 제공)

2018년 탑동 동방파제 건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동 한두기와 서 한두기 사이에 퇴적물로 길이 생겼다. 동네 마실을 다니던 어느 날 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사진을 찍으며 통탄해했다. 용담 구름다리 아래를 들고 나갔던 바닷물이 갇혀 버린 것이다. 얼마 후 장비를 동원하여 다시 물길을 만드는 준설공사를 했다.

인간이 자연에 행하는 작은 행위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상상하지 못하는 변화를 가져온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겸손함이 요구된다. 아름다웠던 탑동 먹돌새기 해변을 해일 문제로 매립을 했지만, 또 다른 피해를 발생시켰고, 경제 논리로 민간 자본을 끌어들인 2차 매립은 파도의 영향으로 재해위험지구가 되었다. 이제 그것을 보완한다고 동방파제를 건립했고 신항만을 계획하고 있다니…….

1976년 당시 해일 방지책을 매립계획이 아닌 다른 방안을 강구하고, 먹돌새기 해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바릇잡기를 할 수 있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심 속 생태환경체험장으로서 제주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자산으로 남았을 것이다. 

제주의 자연환경은 우리 도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원금’ 같은 것이다. 당장 무엇이 급하다고 원금을 까먹는 개발사업에 뛰어들고 있는지? 자연환경의 가치로 만들어진 ‘이자’로도 잘살 수 있는 길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그럼 제주도민의 ‘원금’인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환경은 더 큰 가치로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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