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의 지원으로 지난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간 여수, 순천 지역 다크투어 유적지와 19일과 20일 각각 여수와 순천에서 열린 여·순항쟁 위령제에 다녀왔습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그리고 (사)제주다크투어가 현지에서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 글은 여수와 순천에서 열린 희생자 위령제 및 관련 유적지를 다녀온 후 작성한 후기입니다. 73년 전 동족을 학살하라는 상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며 의거한 국군 제14연대 장병들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무수한 사람들을 기억해 주세요.

해질녘의 여수 바다. 인근에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군국 제14연대 주둔지 옛터가 있다. (사진=신동원)
해질녘의 여수 바다. 인근에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군국 제14연대 주둔지 옛터가 있다. (사진=신동원)

여수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떠올리실 듯합니다. 한때 '제주도 푸른 밤'의 아성을 위협했던 여수 밤바다 실제로 보니 굉장히 멋졌습니다. 감동적이었어요. 그런데 이 멋진 바다도 참혹한 슬픔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섬 곳곳에 밴 제주4·3의 아픔처럼 말이죠.

여·순항쟁 '알못'이 처음 피부로 느낀 여순항쟁의 현지 느낌을 나눕니다.

#그날, 여수 밤바다에서는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中

특별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한 번쯤 흥얼거려봤을, 2010년대를 풍미했던 그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여수 밤바다에는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데 노랫말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수에 있었던 군국 제14연대 주둔지 앞바다. 바다 앞 시멘트로 조성된 공간은 일제시기 군 활주로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제14연대 주둔지에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한화 공장이 들어서 있다. (사진=신동원)
여수에 있었던 군국 제14연대 주둔지 앞바다. 바다 앞 시멘트로 조성된 공간은 일제시기 군 활주로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제14연대 주둔지에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한화 공장이 들어서 있다. (사진=신동원)

1948년 10월 19일 밤 9시,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이하 봉기군)는 제주4·3에 대한 토벌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킵니다.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후 봉기군은 9일간 여수, 순천, 벌교, 보성 등 전남 일대 지역을 장악하며 세를 확대합니다.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토벌군은 봉기군과 전투를 벌이며 여수를 탈환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토벌군은 가용할 수 있는 군부대와 장갑차, 함선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고 10월 27일에서야 여수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 과정 중 봉기군의 주력부대는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펼치게 되고 남은 시민들은 토벌군에 저항하다가 무참히 집단 학살당합니다.

특히, 토벌군과 경찰은 협력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모호해 수많은 억울한 죽음을 양산합니다. '손가락총'의 잔인하고 무신경한 지목이 삶과 죽음을 갈랐습니다.

최근 문을 연 여순사건 기념관에 전시된 '손가락총' 전시물. (사진=신동원)
최근 문을 연 여순사건 기념관에 전시된 '손가락총' 전시물. (사진=신동원)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이 1만이 넘습니다. 1949년 10월 전남도청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1만 1,131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자행된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주민까지 포함하면 최소 1만5천 명 이상이 여수와 순천 등 전남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현지 연구자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여순항쟁은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80회 생일을 맞아 지리산 입산 금지 해제 의지를 밝히면서 얼마 후인 4월 1일 군부에 의한 지리산 입산이 허용, '공식적으로' 종식을 맞게 됩니다.

한편, 올해 6월 제정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여순특별법)'에 따르면 여순항쟁(여수·순천 10·19사건)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제주4·3특별법에서 정의한 '제주4·3사건'과 닮은 꼴입니다. 많은 것들이 생략된 설명이지요.

#여수엑스포 5분 거리에 학살터

만성리 학살터에 건립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사진=신동원)
만성리 학살터에 건립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사진=신동원)

여수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인 여수엑스포 전시장 바로 지척에는 만성리 학살터와 형제묘라는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길 하나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만성리 학살터와 형제묘 역시 여순항쟁을 설명할 때 항상 거론되는 대표적인 다크투어 유적지입니다.

만성리 학살터는 여순항쟁 발발 직후인 1948년 11월 초순부터 토벌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입니다. 봉기군 부역 혐의로 당시 여수 종산국민학교(현재 중앙초등학교)에 잡혀 있던 수백여 명의 민간인이 이곳에서 집단 학살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은 골짜기 속으로 던져져 흙과 돌로 암매장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러한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이 공간은 총성과 비명으로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서 여수시내로 들어올 때 지름길 역할을 했던 길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후 공포와 슬픔의 땅이 되어 사람들이 일부러 먼 길을 둘러 가곤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이곳에서는 새로운 풍습이 생겼다고 합니다. 골짜기에 돌을 던져 넣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었는데요. 이러한 위무 행렬이 한동안 지속되어 골짜기에 돌무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지난 2009년에 건립한 희생자 '여순사건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순항쟁 희생자를 모신 형제묘. (사진=신동원)
여순항쟁 희생자를 모신 형제묘. (사진=신동원)

형제묘는 만성리 학살터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형제묘는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 125명이 군(헌병)에 의해 총살되어 불태워진 학살터입니다. 유족들이 시신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불에 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 덮었다고 합니다. 시신은 3일 밤낮을 탔으며, 그 냄새가 한 달이 넘도록 진동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군은 유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형제묘에도 제단과 봉분, 위령비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생략하고 지워지고…'침묵'하는 비(碑) 뒷면이 의미하는 것

두 유적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의 뒷면, 흔히 그 유적지에 얽힌 내력이 적혀 있는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유적지를 다니다 보면 표지석이나 묘비 같은 것이 세워진 곳이 많습니다. 표지석이나 묘비는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앞면은 물론 비의 옆면이나 뒷면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석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후좌우 모든 면을 촬영하곤 합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만성리 학살터와 형제묘의 경우 비석 뒷면이 특이했습니다.

만성리 학살터 비석 뒷면에는 여순항쟁이 발발한 날짜와 묘비가 세워질 당시의 날짜가 있고 그 사이에 말줄임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요새 말로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줄임말)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별도의 안내판이 유적지 입구에 설치되어 있어 유적지와 관련한 내용은 알 수 있었습니다.

형제묘 비석 뒷면에는 누가 이 비문을 썼다는 내용만 하단에 있을 뿐 정작 내용은 없었습니다.

(왼쪽)만성만성리 학살터에 건립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의 뒷면. 내용이 없이 말줄임표로 되어 있다. (오른쪽)형제묘 묘비 뒷면. 마찬가지로 내용이 없다. (사진=신동원)
(왼쪽)만성만성리 학살터에 건립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의 뒷면. 내용이 없이 말줄임표로 되어 있다. (오른쪽)형제묘 묘비 뒷면. 마찬가지로 내용이 없다. (사진=신동원)

알고 보니 이는 여순항쟁의 '정명(正名)'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습니다.

지역 역사연구자 등을 만나 들은 바에 따르면 여순항쟁을 '사건'으로 볼 것인지, '항쟁'으로 볼 것인지 시각차가 좁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양측에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 같은 다른 지역의 활동가는 거침없이 '항쟁'이라고 부르는 실정입니다.

만성리 학살터 비석을 세울 때 뒷면에 넣을 내용 중 '학살'이라는 표현과 '희생'이라는 표현을 놓고 진통이 있었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 결국 말줄임표로 갈음하게 된 것이지요.

형제묘 비석 뒷면에도 원래는 내용이 있었지만, 비문 위에 얇은 돌판을 덧씌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원래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단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여순특별법 제정 이후 첫 위령제, 이제 시작

10월 19일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열린 제73주기 여순사건 합동 위령제 현장. (사진=신동원)
10월 19일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열린 제73주기 여순사건 합동 위령제 현장. (사진=신동원)
10월 20일 순천 팔마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여순항쟁 희생자 위령제. (사진=신동원)
10월 20일 순천 팔마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여순항쟁 희생자 위령제. (사진=신동원)

지난 10월 19일, 올해 여순항쟁 합동 위령제는 여수 이순신광장 일원에서 열렸습니다. 여순특별법이 올해 6월 29일 통과된 이후 열린 첫 행사였습니다.

이날 여수의 분위기는 제 예상보다는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랐습니다.

이튿날 순천에서도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전날 여수 공식 행사보다 규모 면에서는 작았지만, 유족분들 위주로 참석해 조금 더 추모제다 느낌이 들었습니다.

백발의 유족분들이 "아버지"라고 목놓아 부를 때에는 가슴이 찡했습니다.

제주에서 왔다고 앞에서 발언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전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지면을 빌어 전할까 합니다.

“여·순은 이제야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제주4·3과 비교하면 20년 정도 늦었습니다. 이제서야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제야 시작입니다. 이제야 출발점에 선 것입니다.

부디 유족분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어 과거 국가폭력에 의해 생긴 상처가 치유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교훈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신동원.
신동원.

 

비생산적인 지식이 정말 재밌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청년. 철학과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이 있다. 남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을 동경한다. 지금은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에 적을 두고 있다. 다크투어란 전쟁이나 테러, 재난 등 비극적 역사 현장을 찾아 성찰을 얻는 여행이다. 제주에는 신축항쟁, 일제강점기등과 관련한 유적이 600~800곳에 이른다. 매달 한 차례에 걸쳐 아프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품은 곳들을 안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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