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자락을 타고 밀물지는 바다에서

과물이라는 토명(土名)이 더욱 어울리는 곽지리 바닷가 소로기통에서 출발한 한담산책로는 밀물지는 파도처럼 굽이 돌며 서쪽 마을 애월리의 한담코지까지 이어진다. 치솟은 현무암들이 저마다 희한한 포즈를 잡고 개성을 뽐낸다. 신화적인 변상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옛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이름과 그에 어울리는 이력을 심어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담산책로를 곽지부터 걷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소로기통도 그러하다.

문자속을 들먹이기 좋아했던 옛 양반들은 곽금팔경이라는 여덟 가지 절경을 손에 꼽으며 이 절벽에 치소기암(鴟巢奇巖)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절벽의 울퉁불퉁한 굴곡이 솔개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수사가 곁들여졌다고 한다. 뜻으로야 소로기통과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물음표는 소로기통이라는 이름이 훨씬 어울린다고 여겼다. 마을의 옛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읊어내며 설문대의 흔적을 알려준 동네 할머니 때문이다.

‘저 소로기통 여픠 가민 삼솥바리가 이신디 설문대할망이 솥 앚져난 디렌 허주.’

소로기는 제주사투리로 솔개다. 솔개를 닮은 절벽 앞이 안쪽으로 자루처럼 휘어져 있어서 바닷물이 들어찬다. 마치 갯바위들이 물통처럼 바다를 끌어안고 있어서 통이라고 부른다. 할머니 말로 솔개가 바닷속의 물고기를 사냥하려고 물가를 내려다보며 날개를 펼친 모양이랬다. 아무리 곱씹어도 치소기암보다 훨씬 실감 나는 이름이다. 

물음표는 소로기통을 잠깐 둘러본 뒤 할머니의 이야기를 복기했다. 할머니 설명대로면 이 근처에 삼솥바리가 있어야한다. 하지만 눈이 뚫어지게 샅샅이 살펴도 그런 것은 없고 기묘한 형상의 바위기둥 앞에 ‘용바위’와 ‘으뜸바위’라는 안내판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용머리를 닮았고 하나는 엄지손가락을 곧게 편 주먹 같대서 붙여진 것 같았다.

물음표는 그럴싸하게 묘사한 안내판에 잠깐 눈이 홀렸지만 이내 본연의 목적을 떠올렸다. 조금 더 가면 있으려나 싶어서 산책로를 따라 한담코지 쪽으로 나아갔다. 워낙 절경인 바닷가에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곳이라 물음표의 집중력은 코 묻은 휴지조각처럼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만물상 같은 바위들마다 고양이 바위, 하마바위, 거울바위, 창문바위, 코뿔소바위 등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물음표를 홀리고도 남았다.

비경에 이끌려 걷다보니 물음표는 어느새 한담코지까지 오고 말았다. 신선들 바둑 구경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나무꾼 신세가 된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삼솥바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물음표는 마을 토박이를 찾아 탐문할 작정으로 여행객뿐인 한담산책로를 벗어났다. 때마침 일주도로 위쪽 밭에서 일하는 노인들이 보였다. 취나물을 뜯는 노인 하나가 일손을 멈추고 솥바리, 웨솥바리, 삼솥바리의 정확한 위치와 사연을 조목조목 알려줬다. 마침내 설문대의 흔적과 만나게 됐다.

솥바리(사진=한진오 제공)
솥바리(사진=한진오 제공)

설문대의 화덕이 여럿이니

곽지리에는 설문대가 솥을 안쳐 밥을 지었다는 화덕이 세 곳이나 있다. 첫 번째는 애월리와의 경계지점에 자리한 솥바리다. 한담산책로 애월리 쪽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대략 200M쯤 떨어진 직선거리에 있다. 밭들이 드넓게 펼쳐진 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바위 언덕 세 개가 솥바리다. 제주사투리로 머체라고 부르는 이 바위 언덕들은 집채만큼이나 커서 소나무며 잡목들이 뿌리내릴 정도다. 삼각형 모양으로 둘러앉은 이 머체들이 솥을 얹히는 화덕이라면 그 가운데 너른 밭은 아궁이인 셈이다. 아궁이 한복판에 서서 세 개의 머체 위에 안쳤을 솥을 상상하면 어마어마한 크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곳이 설문대의 솥바리라는 걸 아는 이들도 대부분 사라진 탓이다. 그저 밭 사이의 바위 언덕이나 돌무지 정도로만 보여서 누구도 신성이 서린 곳이란 걸 감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솥바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마치 사람이 쌓은 탑처럼 보이는 우뚝 솟은 바위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설문대의 웨솥바리다. 솥바리에서 걸어서 5분 정도면 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웨솥바리 앞에는 문필지봉이라는 안내판과 비석 하나가 이 곳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내판과 비석 모두 이 기묘한 바위기둥이 붓대처럼 생겨서 이 마을에 문사가 많이 배출된다는 설명이다. 해서 근래에도 입시나 자격시험을 앞둔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바위기둥 앞에 놓인 평평한 바위가 제단인 듯하다.

웨솥바리(사진=한진오 제공)
웨솥바리(사진=한진오 제공)

그런데 제단을 살피다 보면 비석 뒷면의 비문이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이 바위기둥이 설문대의 웨솥바리라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앞면에는 문필지봉의 사연이 있고 뒷면에는 설문대의 사연이 적혀 있는 것이다. 설문대의 사연인 즉 여신께서 이 바위기둥에 솥을 앉히려고 했는데 솥받침돌이 딸랑 하나뿐이라서 다른 곳을 살피다 소로기통 앞의 삼솥바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삼솥바리에 솥을 안치려고 했더니 가운데 받침돌이 짧아서 솥이 자꾸 기울었다. 이에 설문대는 웨솥바리의 꼭대기를 잘라다 삼솥바리를 보완해서 솥을 걸었다. 밥을 다 지은 뒤에 다시 웨솥바리의 꼭대기를 제대로 갖다 붙여놓아서 이 바위기둥의 꼭대기에 다른 바위가 얹어져 있다는 것이다.

웨솥바리는 오랜 풍상에 시달리다 무너졌었는데 2003년10월에 복원했다고 비문에 쓰여 있다. 비석도 그때쯤 함께 세운 모양인데 앞뒷면에 쓰인 비문이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아마도 유교문화가 널리 퍼지기 전까지 이 바위기둥은 설문대의 화덕으로 숭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유교적 색채로 변신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이런 모습을 지닌 바위기둥들에 ‘문필봉’이라는 붙여놓은 사례가 허다한데 대부분 고대의 거석숭배신앙에서 유교문화의 전설지로 거듭났다고 봐야 옳겠다. 아무튼 웨솥바리의 비석 앞뒷면의 비문은 자연을 대하는 옛사람들의 세계관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보인다.

삼솥바리(사진=한진오 제공)
삼솥바리(사진=한진오 제공)

다시 삼솥바리로

물음표가 애초에 목적했던 삼솥바리는 소로기통 곁에 자리한 세 개의 갯바위다. 수년 전 물음표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한담산책로에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안내판들이 바위마다 이름표처럼 붙여져 있었다. 물음표가 마주쳤던 고양이바위, 코뿔소바위, 거울바위 등이 그것인데 안타깝게도 설문대의 화덕인 삼솥바리에조차 용바위, 으뜸바위라는 이름표만 달려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토리텔링 안내판들은 몇 해 뒤 사라졌다. 

삼솥바리는 그다지 크지 않는 바위기둥들인데 삼각형의 대형을 이루고 있어서 설문대가 솥은 안치기에 적당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가운데 바위가 전설이 말하는 대로 높이가 낮아서 웨솥바리 꼭대기를 갖다 얹으면 균형이 잡히리란 생각을 들게 한다. 전설은 이렇게 그럴 듯한 증거를 남기는 의무를 잊지 않는다.

다시 돌이켜보면 곽지리에 흩어져 있는 설문대의 화덕들은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이 확인된다. 태초에는 솥바리, 웨솥바리, 삼솥바리라는 신성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지만 풍상을 겪는 사이 망각이라는 그물에 포획되어 문필봉이 되었고, 다시 용바위며 으뜸바위가 되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본연의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아직까지 육신이 살아남아있다는 점이다. 해묵은 시의 한 구절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가 지금이다. 하루가 다르게 파괴의 가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지금 설문대의 신성이 깃든 이 바위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하지 않겠나.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한진오는 제주도굿에 빠져 탈장르 창작활동을 벌이는 작가다. 스스로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무허가 인간문화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자신의 탈장르 창작 활동에는 굿의 ‘비결정성’과 ‘주술적 사실주의’가 관통한다고 소개한다. 저서로 제주신화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한그루, 2019),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걷는사람, 2020)가 있고 공저로 ‘이용옥 심방 본풀이’(보고사, 2009) 등 다수가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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