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이 일흔아홉 번째 생신을 맞아 제주에 내려오셨다. 서른두 살에 은사님을 만나 학문과 술을 통해 삶을 배웠다. 은사님은 돈 없는 학생의 처지를 헤아려 자비를 들여가며 제주에 내려와 주례를 서주셨다. 결혼 10주년에는 자폐아 딸을 키우느라 여행을 못가는 우리 부부를 위해 일주일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주시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년에 한 번씩 우리 가족은 육지에 올라가 교수님 댁에서 자고, 교수님 내외분은 제주에 내려와 우리 집에서 주무신다.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며 소식을 주고받는다.
돈을 번다고 큰 딸이 케이크를, 작은 딸이 술을 산다고 했다. 작은 딸이 폼 나게 생신을 축하하려면 샴페인을 터트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샴페인을 사오면 제주도를 사주겠다고 했다. 샴페인은 프랑스의 한 지역인 샹파뉴의 영어 지명으로 샹파뉴의 철자와 똑같다.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하는 발포성 와인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다른 지역에서도 발포성 와인에 샴페인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팔았다. 그러다보니 지역명칭 샴페인이 발포성 와인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굳어졌다.
지리적 명성을 지적재산권으로 보호하기 위해 EU는 2008년부터 샹파뉴 지역 이외에서 생산된 발포성 포도주에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 후부터는 샴페인과 똑같은 제조방식으로 만든 프랑스 지역에서 생산한 발포성 와인도 샴페인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고 ‘크레망’이나 ‘뱅무소’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주세법에서 샴페인을 발포성 포도주로 변경하여야만 했다.
우리나라는 1999년 지리적 특성을 지닌 지역특산품의 명칭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지리적 표시제의 근거를 농수산물품질관리법에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2000년 보성녹차를 시작으로 현재 고창복분자, 횡성한우 등 101건이 등록되어 있다. 제주에서는 제주돼지고기, 제주녹차, 제주한라봉이 이름을 올렸다.
지리적표시제는 2007년 진행된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이슈로 부각되었다. EU가 햄, 치즈 등의 농식품에 대해서도 지리적 표시제 적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상호주의에 의해 우리나라의 지리적 표시품도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지리적 표시제가 활성화 된 EU에 비해 우리나라가 훨씬 불리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와 EU는 EU의 162개 품목, 우리나라의 64개 품목을 지리적 표시제로 보호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이처럼 지리적 표시제는 국가 간 무역에 있어 자국의 생산자와 해당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비관세무역장벽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지리적 표시제는 농수산물 또는 농수산 가공품의 명성·품질 특징이 본질적으로 특정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하는 경우 그 특정지역에서 생산된 특산품임을 표시하여 보호하는 제도이다. 제주도는 특유의 토양과 기후 및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리적 특성이 강한 농식품이 상당히 많다.
고사리, 양하, 옥돔, 자리돔, 말고기, 빙떡, 보리빵, 오메기술, 막걸리, 푸른콩 된장 등은 제주라는 브랜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농식품들이다. 문제는 지리적 표시품이 되려면 그 제품은 해당 지역 원료를 사용해야만 하는데, 빙떡, 보리빵, 오메기술, 막걸리에 들어가는 원료는 제주산이 아니고, 고사리, 옥돔 등은 원산지를 속여 파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위의 품목들을 지리적 표시품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주산 원료가 필요만큼 생산되지도 않고, 상대적으로 비싸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리적 표시품이 일반제품에 비해 비싸게 팔리진 않는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MZ세대를 중심으로 가격 대비 품질이 높은 가성비 위주의 소비를 넘어 본인이 가치를 부여하는 만족도가 높은 상품을 가격에 상관없이 구매하는 가치소비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착한 소비, 바이 소셜, 그린슈머, 코즈 마케팅, 미닝아웃 등의 용어가 소비 트렌드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제주의 농식품도 이러한 소비 트렌드에 맞추어 생산되어야 한다. 친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조, 메밀, 양하, 푸른콩 등 제주가치를 지닌 농작물과 그 가공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딸아! 이번에는 샴페인 대신 이름만 제주인 맥주로 교수님의 생신을 축하드렸지만 다음에는 제주 차조를 삼다수로 빚어서 만든 제주 고소리술로 가장 제주다운 축하를 드리자. 그리고 아빠는 개성이 넘치는 작은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 작은 동지끼리 더욱 파이팅하자.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격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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