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지민)
(사진=김지민)

지난 10월, 희망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아말’이라는 친구가 영국 도버항에 도착했다. 난민인 아말은 얼마 전 영국에서 10살 생일을 맞이했다. 사실 아말은 3.5m의 커다란 인형이다. 속에 사람이 들어가야 움직일 수 있는 퍼펫인데, 인형의 본체에 1명,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1명, 총 3명의 사람이 필요하다. 아말은 시리아의 국경 터키에서 영국까지 실제로 난민들이 탈출하는 경로를 포함해 약 8000㎞를 걸어왔다. 나 또한 실제로 아말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난달 23일 아침 세인트 폴 대성당 앞으로 향했다. 예정된 시간이 되기도 전부터 성당 앞 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사가 적힌 종이를 들고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뮤지컬 올리버! (찰스 디킨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 각색)의 곡, ‘Consider Yourself’라는 노래였다. 너 자신을 우리의 친구로, 우리의 가족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노래다.

특히 어린이 친구들이 많이 모인 행사였다. 다양한 피부색의 어린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부르는 노랫소리는 더 높고 활기찼다. 히잡을 쓴 친구들 옆으로는 성공회 신부님들이 서 계셨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말의 걸음걸음을 응원하고 있었다. ‘너를 정말 환영해’라고 마이크를 타고 널리 울리는 목소리에 어쩐지 목이 메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아말을 보곤 걸음을 멈춰서서 함께 박수를 쳤다. 지금도 떠올리면 뭉클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이방인들을 환영하는가?

아말은 총 8개의 나라를 방문했고 많은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아말은 많은 무슬림 난민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종교에 대한 많은 오해가 낳은 무참한 시선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아말은 그저 인형일 뿐이다. 난민들이 갖는 부정적 인식 중 그 어느 것도 수행할 수 없다. 인형 아말은 일자리를 빼앗지도 않고, 테러를 일으킬 수도 없다.

결국 아말에 대한 냉대는 아말이 갖는 난민이라는 상징성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난민이라는 것은 사실 법적 지위 및 상태를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난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니지 않는 이상, 누가 난민인지 알 수 없다. 그 냉대의 근간은, ‘누가’ 난민이 되었는가, 그는 어떤 종교를 가졌고, 어떤 피부색을 가졌으며, 어느 지역 출신인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등 한 사람의 정체성에 맞닿은 차별이다.

브렉시트가 결정되고 난 이후, 부쩍 길거리 괴롭힘을 많이 경험했다. 심각한 상해를 동반한 경험은 없었지만, 어느 백인 노인의 언어폭력은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태어나서 처음 타인에게 그런 모욕적인 단어들을 들었다. 대충 더럽고 추잡한 몸 팔러 온 동양인 계집애 정도였다. 눈이 마주쳤고 그 길에는 나밖에 없었으므로 나를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진짜로 나한테 한 말인가? 사람한테 저런 말을 진짜 한다고?’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황 자체를 인지하긴 힘들었지만 심장은 세게 뛰었다. 본능이 위협을 감지한 것이다. 못 들은 척 빠른 걸음으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기 전 계속해서 그 상황을 곱씹다가 결국 내가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인지했다. 그제야 침대를 구르고 이불을 차다가 애꿎은 베개만 때리며 ‘딱 한 대만 때려 줬으면 좋았을걸’하고, 실제로는 이루지도 못할 분통을 터뜨리며 며칠간 잠을 못 이뤘다.

이방인들은 모두가 한 번쯤은 느낀다. 내가 갖는 ‘다름’ 때문에 이 땅에서는 내가 안전할 수 없다는, 땅이 흔들리는 기분을. 내가 키가 작아서, 내가 여자라서,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내가 백인이 아니라서, 내가 길거리에서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나의 ‘다름’은 주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이유가 되서는 안 되는 이유를 곱씹다 보면 남는 것은 비참함뿐이다. 내 선택이 아닌 것으로 나를 괴롭히면 서럽고 억울하고 종래에는 ‘한 대만 때려 줄걸’ 하고 마음이 비틀리기도 한다.

무수한 차별과 잘못된 인식을 마주하는 수많은 ‘아말’들이 밟고 선 땅은 얼마나 흔들리고 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성별, 인종, 장애, 나이 등에 대한 차별은 사람들이 딛고 선 땅을 뒤흔들며 마음을 다치게 한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게 되면 나를 환영하고, 나와 연대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사회의 많은 ‘아말’들이 어린이들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공간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딛고 선 땅을 함께 딛고 ‘누군가는 너를 핍박해도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많아, 그러니까 용기를 잃지 마.’ 그런 메시지를 주었다. 그리고 차별주의자들에게는 우리 사회에는 이방인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이만큼 있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본다고. 그러니까 그 무의미한 폭력을 멈추라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이방인이다. 설령 같은 피부색, 같은 언어,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서로의 삶에 이방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와 다름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기보다는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함께 살아가는, 좀 더 나은 ‘우리’의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김지민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제주 4·3에 대해 연구 중인 김지민은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와 런던을 잇는 [지민in런던]은 매월 둘째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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