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왕성하게 잘 자라던 유월두는 기후탓인지 꽃이 피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사진=김연주 제공)
이리 왕성하게 잘 자라던 유월두는 기후탓인지 꽃이 피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사진=김연주 제공)

올해로 콩농사를 지은 지 9년차이다. 첫 3년은 콩농사가 제일 쉽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 3년은 콩농사 욕심 좀 내 볼까? 생각했고 최근 3년은 거의 모든 콩농사를 말아먹고 수확을 포기했다. 지금은 콩농사는 절대로 다시 하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조그만 텃밭에다 쪽파나부랭이를 심다가 밭다운 밭을 얻어 콩농사를 처음 지은 해. 영롱하게 빛나던 콩알들을 보며 무얼할까를 얼마나 고민했던지…. 수많은 콩알들을 헤아려 보며 돈으로 바꾸는 셈을 해 보는 순간 얼마나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팠덨지. 그 기억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하루 종일을 밭에서 땅을 일구어도 우리집 방 한칸만큼도 일구지 못하던 그 시절. 그렇게도 열심히 매일을 콩을 심고 풀을 매고 그리고 수확을 하고 갈무리하고, 그 시절에는 심는 것만을 좋아했었다. 심고 심고 또 심고, 어떤 경우에는 씨앗을 심은 곳에 또 다른 씨앗을 심는 경우도 있었다. 

일구지 않은 땅이 아직도 저리 넓은데 그곳에다 두 번씩 심을 것은 또 뭐람. 심는 즐거움이 그리 큰 즐거움인 줄, 그리고 씨앗을 갈무리 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고 복잡하고 지난한 일인 줄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 그렇게 한 3년은 10kg이 안 되는 양의 토종콩을 수확했던 것 같다. 

콩으로 시장에 내다 팔기 아까워 궁리 끝에 청국장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먹어본 적도 없고 먹을 줄도 모르는 청국장을 검색하고 공부해서 만들었는데 너무나 구수하게 잘 띄워진 청국장이 탄생했고, 지금껏 조금씩 꾸준히 만들어 장터에서 판매하고 있다. 해마다 청국장 만드는 양이 늘었고 따라서 욕심도 해마다 늘어났던 것이다. 

이러다 청국장 가공 공장을 가끔은 꿈꾸고 콩 농사를 대량으로 하여 성공하는 꿈을 꾸기도 하면서 첫 3년을 희망과 꿈에 부풀어 지냈다. 그럭저럭 귀농을 꿈꾸고 계획을 세우고 콩 전문가가 되어보리란 계획도 세우면서 차츰 농촌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인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3년을 또 지냈다. 

이리 왕성하게 잘 자라던 유월두는 기후탓인지 꽃이 피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사진=김연주 제공)
이리 왕성하게 잘 자라던 유월두는 기후탓인지 꽃이 피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사진=김연주 제공)

나름 특성을 잘 조사하여 제주에 더 잘 맞는 토종콩을 발굴하겠단 욕심에 전국의 여러 콩들을 심어 보기도 하였다. 제주의 대표 토종콩인 푸른콩은 무얼 해도 맛있는 아주 탁월한 콩이었다. 

미숙언니가 만드는 우영두부는 최고의 맛이고 된장을 담아도, 청국장을 띄워도 심지어 콩국수를 말아도 다른 어떤 콩국수보다 구수하고 일품이다. 이처럼 푸른콩이 탁월하게 맛이 있지만 조생종 콩도 있었으면 좋겠고, 콩나물콩도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콩 욕심을 그리도 내었다. 

한 알 한 알 일일이 심고 가꾸는 방식이라 많은 양을 재배하지 못하다보니 수확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했다.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기계 수확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두 번째 3년은 쥐눈이콩이 자연재배에는 꽤 적합한 콩임을 알게 되었고 가뭄에도 약하고 큰 비에도 약한 게 콩이지만 그래도 나름 가뭄에는 강한 게 콩임을 알게 되는 시기였다. 조생종을 찾아보겠노라고 경기도 화성에서 재배하던 유월두를 심었는데 꽃만 무성하게 피고 꼬투리가 차지 않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이렇다할 조생종을 찾지는 못하였다. 우리나라가 콩 원산지라 할 만큼 콩 종류가 다양하지만 지역마다 다른콩이 적응해 자라고, 같은 콩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특성을 달리하여 자라는 경향도 보인다. 제주토종 푸른콩이 그리도 달큰하고 고소하고 맛있으나 다른 지방에서 재배하면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한다. 

사실 줄파종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유일하게 줄파종을 하지 않는곳이 제주라는데 그 이유가 분명 있을테다. 우리도 세번의 연이은 태풍으로 겨우 씨앗을 잃지 않는 수준.(사진=김연주 제공)
사실 줄파종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유일하게 줄파종을 하지 않는곳이 제주라는데 그 이유가 분명 있을테다. 우리도 세번의 연이은 태풍으로 겨우 씨앗을 잃지 않는 수준.(사진=김연주 제공)

마지막 3년의 첫해. 아버님이 하시던 밭을 이어받아 콩농사를 지은 첫해였다. 농약을 치고 인부를 동원해 검질을 매고 나름 열심히 관리하였으나 열매가 영글어 가던 중요한 시기에 우박을 맞았다. 고스란히 쭉정이로 말라 삐뚤어졌고 수확량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런 콩농사는 지속가능하지 않음에 동의하고 다음해인 작년 우리는 여러 가지 토종콩을 줄파종하여 무 제초제로 관리하였다. 무동력 줄파종기로 둘이서 열심히 밀고 다녔다. 흙이 뜨거운 태양아래 달구어져 얼마나 힘이 들던지. 다행히 싹은 고르게 잘 올라와서 밭에 나가 보고 있으면 나름 뿌듯했다. 

어느 정도 싹이 자라서 본 잎이 몇 장 나오자 일일이 순치기를 해 주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둘이서 땅에 엎드려 하나하나 따 주었다. 얼마나 잘 자라줄지 훗날을 기대하면서, 태풍에 대비하여 중경도 해 주었다. 줄 파종한 사이사이 고랑에 흙을 올려주어 콩이 쓰러지지 않고 튼실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그런데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연속 세 번의 태풍으로 콩은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견뎌내질 못했다. 그나마 꼬투리에 들어 있는 알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여름내내 정성을 다하여 콩 밭을 가꾸었으나 수확철이 되어 콩잎이 시들어 떨어지고 나니 낮게 엎드려 기회를 노리던 풀이 일제히 콩나무 위로 솟아났다. 

손으로 수확을 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풀이 기계수확을 할 때는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잘라 담아 털어내는 방식의 콤바인이 푸른 풀들을 같이 수확하여 통속에 굴려 버리는 바람에 흰콩이 초록색으로 변해 버리는 낭패를 보았던 것이다. 

순지르기를 해준 후 왕성하게 자라는 콩. (사진=김연주 제공)
순지르기를 해준 후 왕성하게 자라는 콩. (사진=김연주 제공)

크게 자란 초록의 풀들을 제거해 주지 않으면 기계수확이 어렵단 것이다. 이런 세상에나 여름내내 풀을 뽑느라 허리가 휠 정도인데 수확을 앞두고 또 풀을 뽑아야 하다니!!  왜 한 살림 매장에도 콩을 비롯한 잡곡은 무농약이 그리 귀한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풀이 무섭다고 느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래도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아래 부쩍 자란 풀도 가볍게 제압했었는데 가을바람 살랑살랑 부는 수확의 계절에 콩밭의 풀은 나를 기겁하게 했다. 다시는 제초제를 안 하는 콩농사를 짓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 조그맣게 자연재배 콩농사를 지었건만 많아도 너무 많은 비님 덕분에 열매가 너무 부실하여 수확을 포기하였다. 내리 3년 거의 모든 콩밭을 폐작한 셈이다. 더 이상 콩농사에 미련을 두지 말자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다. 푸른콩이 제 아무리 맛있다 한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농사일이 쉬운 듯하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마음을 다 잡을 기회를 주는가보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탓일까? 쉽게 가려했을까? 요즘 화두인 기후 위기의 문제도 적지 않을 테지만 다시 한번 초심을 생각하고, 심호흡 길게 하고 콩 씨앗을 갈무리해보자.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3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