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와 최후의 발자취를 찾아서

솥바리, 삼솥바리, 웨솥바리, 공깃돌바위 등 설문대의 신성이 깃든 전설지가 몰려있는 애월읍의 상가리, 애월리, 곽지리는 가히 창조주의 메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곳이다. 한라산부터 시작해서 제주섬 곳곳에 설문대가 빚어내지 않은 데라곤 한 군데도 없으니 이 곳만 메카라고 하기엔 자칫 억지스럽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음표는 이 세 마을을 설문대의 메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물음표가 내린 결정의 근거는 바로 이야기다. 바위며 오름이며 다양한 자연물에 이름과 사연을 부여한 설문대의 이야기는 태초의 첫걸음부터 오늘에 이르는 사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기를 거듭했을 것이다. 태초의 시간에서 멀어질수록 새로 생겨나는 이야기보다 사라져간 이야기가 많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사이 그것의 주인공이었던 자연물들은 이름 없는 바위와 샘이 되고 부서지고 메워지며 끝내 영혼과 육신을 잃고 말았다. 설문대의 흔적들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가운데 세 마을의 전설지들은 위태롭지만 살아남은 축에 들었으니 메카라고 불러도 손색없다는 것이 물음표의 판단이었다.

물음표의 고질병은 이곳이 설문대의 메카로 남을 수 있게 만든 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부호를 머릿속에 처박아놓았다. 도대체 왜 옹기종기 붙어 앉은 세 마을에 설문대전설지가 밀집된 것일까? 어떤 이들이 설문대의 사연을 잊지 않고 지켜온 것일까? 물음표는 질문꾸러미를 한가득 짊어진 채 세 마을을 전전하며 귀동냥을 쉬지 않았다. 그 덕에 물음표는 설문대의 이름을 처음으로 묵향에 새겨 세상에 남긴 조선시대의 사람과 생의 마지막까지 설문대를 숭배했던 20세기의 사람을 알아내게 되었다.

(사진=한진오 제공)
애월읍 한담코지 전경(사진=한진오 제공)

뱃사람들은 누구에게 기도했나

오랜 세월 제주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설문대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긴 이는 18세기의 인물로 애월리의 한담마을에서 살았던 녹담거사 장한철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글재주가 매우 뛰어나 1770년 제주목에서 실시된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주변 사람들은 궁벽한 섬에서 썩기엔 그의 학식이 너무나 아깝다며 돈을 모아 한양에서 치르는 대과에 응시하라고 의기투합했다. 장한철은 마을사람들의 격려 속에 마음을 굳혔고 같은 해 겨울에 뭍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를 포함해 29명이 함께 탄 배는 순항을 시작했지만 풍파를 만나 격랑 위의 가랑잎처럼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약 없는 표류는 사흘째 이어졌다. 장한철 일행은 오키나와의 옛 왕국인 류큐 제도의 작은 섬 호산도에 이르렀다. 호산도에서 며칠을 보내던 중 갑자기 나타난 왜구들이 그나마 지니고 있던 물자를 모두 빼앗고는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근처를 지나던 안남(오늘날의 베트남) 상선에 구조되었지만 안남상인들조차도 장한철 일행을 조각배에 실어 유기해버렸다. 다시 폭풍우에 휘말려 생사를 오간 끝에 마침내 청산도에 닿아 기적적인 생환에 성공했다. 이후 장한철은 다시 글공부에 매진해 1775년 별시에 급제한 뒤 대정현감과 흡곡현령을 지냈다고 한다.

(사진=한진오 제공)
장한철 생가(사진=한진오 제공)

장한철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표류를 후세에 남기리란 작정으로 ‘표해록’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바로 이 책에 설문대의 이름으로 보이는 존재가 등장한다. 안남 상선에 구조되어 호산도를 떠나 조선바다로 접어들 무렵 수평선 너머로 한라산이 아득한 모습을 보이자 장한철 일행 중 뱃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는 것이다.

“백록선자 활아활아(白鹿仙子活我活我) 선마선파 활아활아(詵麻仙婆活我活我).”

백록선자는 한라산신을 이르는 것이고 선마선파는 설문대를 이르는 것이었다. 제주의 뱃사공들이 ‘한라산 산신령님 저희를 살려주십써. 설문대할마님 저희를 살려주십써.’ 외쳤던 비념을 장한철은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또한 장한철은 설문대는 서해바다를 건너온 거대한 여신이며 선마고(詵麻姑)라는 또 다른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워낙 마을마다 설문대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것은 장한철의 시대에도 비슷했던 모양인데, 그의 표해록은 여신의 이름뿐 아니라 제주사람들이 설문대를 열렬히 숭배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더욱이 서해바다를 건너와 한라산에서 놀이를 즐겼다는 사연까지 소개하고 있어서 간소하지만 설화까지 삽입해 설문대를 설명했다. 담수계의 증보 탐라지(耽羅誌), 이원조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김두봉의 제주도실기에도 설문대는 설만두고(雪慢頭姑), 사만두고(沙曼頭姑), 사마고파(沙麻姑婆) 등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장한철의 표해록이야말로 최초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진=한진오 제공)
장한철 기적비(사진=한진오 제공)

창조주를 모시던 마지막 단골

애월리에는 설문대를 최초로 기록한 장한철이 있는가 하면 어쩌면 최후의 설문대 숭배자라고 할 수 있는 이도 있다. 소설가 오성찬의 제주의 마을 시리즈 애월리 편에 ‘애월할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 주인공은 30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버선을 만들어서 설문대에게 바치겠다는 등 극진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실제로 애월리 주민들 중에는 이 할망의 사연을 알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손주의 이름을 붙여서 ‘대경이 할망’이라거나 마을에 학교를 만들 때 많은 돈을 기부했대서 ‘공덕할망’이라고 부른다. 신심이 어찌나 깊었던지 마을사람들에게 설문대할망을 섬기지 않으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며 마치 종교의 전도사처럼 여기저기 설파했다고 한다.

이 할망은 평소에도 매우 특이한 행동을 보이곤 했다는데 젊은 여성을 짧은 치마를 입거나 퍼머를 한 모습과 마주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근본 없는 짓을 한다며 면박을 줬다는 것이다. 태초의 시대에서 타임슬립을 한 시간여행자 같은 이 할망은 개발과 신문물을 끔찍하게 싫어했다는데 워낙 유별나서 근동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소위 개명된 시대에 해묵은 전설 속 여신을 숭배하는 이 할망의 행적은 돈키호테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창조주의 섬땅을 오롯이 지켜가려고 했던 그의 신심은 대단한 울림을 남긴다. 여신이 빚은 오름만큼이나 큰 마천루를 짓고 자연을 떡 주무르듯이 쉽사리 파괴하는 오늘의 제주를 겪는 사람들로서야 감응할 수밖에 없으리라. 어쩌면 애월할망은 설문대를 숭배했던 마지막 단골이라기보다 여신의 환생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한진오는 제주도굿에 빠져 탈장르 창작활동을 벌이는 작가다. 스스로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무허가 인간문화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자신의 탈장르 창작 활동에는 굿의 ‘비결정성’과 ‘주술적 사실주의’가 관통한다고 소개한다. 저서로 제주신화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한그루, 2019),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걷는사람, 2020)가 있고 공저로 ‘이용옥 심방 본풀이’(보고사, 2009) 등 다수가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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