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미국에서 한의사 생활을 하면서 누리는 기쁨중에 하나는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을 가진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내 한의원을 방문한 이들의 나라만 따져도 아마 40여 개국이 될 듯하다. 아시아의  필리핀, 베트남, 중국을 비롯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아와 북한 출신 새터민에서부터 멀리 아프리카의 모로코, 남아공과 나이지리아를 비롯 변방 유럽의 슬로베니아까지 참으로 역동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 구경 실컷 하는 팔자 좋은 한의사라고 환자분들이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민자들은 각자의 사연을 갖고 이 미국 땅에 도착을 했기에 서툰 영어로 애써 설명하려는 내 모습을 보며 상당히 반가워하고 친근한 모습을 보일 때가 대부분이다. 아마 자신들이 느꼈을 여러 감정의 차별과 이민의 무게를 내가 충분히 공감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여러 나라의 이민자 중 연민과 동정의 눈길이 더욱 많이 머무는 친구들은  중·남미 출신 라티노 히스패닉들이다. 멕시코의 아스텍, 과테말라의 마야, 페루의 잉카 문명과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메스띠소(Mestizo) 정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반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 같다.

대체로 이 지역에 체류하는 히스패닉들은 페루나 브라질의 남미 출신들보다는 미국과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있는 중앙아메리카 라티노들, 즉 멕시코, 엘살바도르로, 온두라스, 과테말라 출신들이 많다.

내가 겪어본 이들 라티노는 대체로 순하고 정이 많으며, 잘 웃는 게 특징이다. 이 곳에서 열심히 일해 자신들의 고향에 돈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넓은 집에 가족들과 오손도손 사는 게 꿈이라고 대부분이  말한다. 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어릴 적 내 동네가 생각이 많이 난다.

어릴 적 내 동네에는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신 친구 아버지들이 참 많았다. 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친구들의 아버지들도 없었다. 그러다 하루는 내 친한 동무의 아버지가 공사 현장에서 일본말을 못 알아들어 포크레인에 머리를 맞아 돌아가셨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아마 이때부터 친구 아버지들이 가끔 나타나 친구들 가족에 나를 함께 데리고 읍내 식당에서 짜장면 사주던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산방산 부근의 밭에서 고구마를 기계로 썰어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얗게 마르는 고구마, 이것들은 주로 주정의 원료로 쓰여졌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산방산 부근의 밭에서 고구마를 기계로 썰어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얗게 마르는 고구마, 이것들은 주로 주정의 원료로 쓰여졌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파란 하늘과 그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닷가, 소나무로 우거진 숲들, 굽이굽이 새로 깐 시멘트 길로 이어진 올레길들과 난장이 마을처럼 낮디 낮은 키를 가진 집들이 모여 만든 바다가 바로 마주 보는 곳에 둥지를 튼 동네, 잔치나 초상이 나면 3일이나 5일간 학교 학생들 반찬이 다 똑같았던 동네. 품앗이로 농사를 짓고, 물질이 서툰 옆집 젊은 해녀들에게 고참 해녀가 소라나 전복을 몇 개씩 건네주던 동네. 과부였던 어머니가 큰 소리 내어 호통을 쳐도 다 받아 주었던 동네. 내 동네뿐만 아니라 제주의 온 동네가 늘 가난했지만 따뜻한 동네였을 것이다.

라티노들은 이런 따뜻한 동네를 두고,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들을 두고 어릴적 내 친구들의 아버지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긴 길을 걸어서 미국으로 향한다. 대부분 몇백 킬로에서 길게는 수천 킬로를 사막과 산과 정글과 강들을 건너며 이 미국 땅에 도착한 이들이다. 어린이들부터 노인들까지 미국이라는 그들에겐 영화에서나 보는 상상 속 꿈의 나라로 다시금 고향 공동체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목숨을 걸고 걸어서 온다. 추위와 굶주림을 비롯한 강도와 살인의 위협을 견디며 밟은 미국 땅에서의 삶도 만만치가 않음을 그들은 곧 깨닫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 특별히 잘해 주고 싶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맘이 많이 드는가 보다. 라티노들이 치료받고 돌아가면 가끔 틀어 듣는 노래, 미국으로의 고난의 길을 그린 노래가 바로 ‘donde voy’  번역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란 제목을 가진 노래이다.

가사는 이렇다

“새벽은 내가 달아나는 걸 찾아내고, 하늘 아래에선 색색이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네요.

태양이여 연방 이민국의 추적에 쫓기는 나를 비추지 마세요

내 가슴속에 느끼는 고통은 사랑에 다친 내 마음이지요.

나는 생각해요. 당신과 당신의 어깨,  당신의 키스와 당신의 사랑이 날 기다린다고…

어디로 가야 하나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희망은 내운명이지요. 나혼자 나 홀로 사막을 지나 도망쳐 가지요.

하루 한주 한 달이 가고 당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요. 당신이 얼마간의 돈을 받고 당신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동은 내 시간을 채우고 당신의 웃음을 난 잊을 수 없어요. 당신의 사랑이 없는 삶은 살아있는 게 아니예요.

도망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돈을 벌려 더는 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된 제주는 이제 물질 풍요 속 공동체 파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씩 나이가 드니 정이 많았던 사람 사는 동네가 가장 그립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간다. 제주 공동체가 나이 들어 가끔 찾아가도 넉넉하고 사람 사는 따뜻한 공동체가 유지되길 빌어본다.
 

양영준
제주 한경면이 고향인 양영준 한의사는 2000년 미국으로 이주, 새 삶을 꿈꾸다. 건설 노동자, 자동차 정비, 편의점 운영 등 온갖 일을 하다가 미 연방 우정사업부에 11년 몸담은 ‘어공’ 출신. 이민 16년차 돌연 침 놓는 한의사가 되다. 외가가 북촌 4.3 희생자다. 현재 미주제주4.3유족회준비위원을 맡고 있으며 민주평통워싱턴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제주투데이 칼럼 [워싱턴리포트]를 통해 미국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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